롤러장의 추억 Call Me

음악 이야기 2008. 2. 6. 08:36 Posted by cinemAgora


나는 롤러스케이트장 죽돌이였다. 동네 대형 마트 옥상에 롤러스케이트장이 들어온 게 초등학교 5학년 때. 그 후로 용돈만 생기면 쪼르르 그곳으로 달려갔고, 쿵짝 쿵짝 들려오는 리듬에 맞춰 옆으로 가기와 뒤로 가기를 맹렬히 연습했다.

친구들끼리는 그곳을 '롤라장'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 어감조차 사랑했다. 디스코텍을 뜻하는 '닭장'이나 '고고장'보다 덜 퇴폐적이고 훨씬 더 경쾌한 느낌. 듣기만 해도 내 몸이 '룰루랄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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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롤러 스케이트는 지금의 롤러 브레이드와 달리 신발 앞 뒤로 바퀴가 2개씩 나란히 달려 있었다. 신발 앞코에 붙은 뭉툭한 고무는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 체중이 가벼운 초등학생이 롤러 스케이트를 타면 <캐리비안의 해적>의 조니 뎁이 뛰어다니듯, 거의 신발에 끌려 다니는 것처럼 보일 지경으로 무게도 꽤 나갔다. 그러나 어느 정도 스케이팅에 통달하게 되면 그 중력의 압박을 회유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되는데, 나 역시 중학교 1학년 쯤에는 그 수준에 도달하게 됐다.

거창하게 말하면, 관건은 바퀴가 굴러가는 운동 역학에 내 몸을 맞추되, 바퀴의 물리적 속성을 본능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었다. 그 통제력에 따라 옆으로 가다가 뒤로 가기, 연속 동작을 통해 마치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듯한 동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때 한발은 열심히 좌우로 움직여 동력을 제공하고 다른 한발로는 방향을 잡는다. 사실 옆으로 가는 동작은 마치 게가 달려 가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지만 속력을 내면 그 포즈도 꽤 멋져 보인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뒤로 달리기로 턴하는 과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도 중요하다. 한번 뒤로 돌면 시선을 후방 45도 각도로 고정한 채 특히 코너를 돌 때 바짝 신경을 써야 한다. 다른 롤러맨들과 충돌하는 불상사로 애써 고양시켜 놓은 스타일을 단번에 구기지 않기 위해서다. 특히 여학생이나 초보자와 부딪히면 대망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브레이크를 잡을 때! 가능한 최대 가속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한쪽 발의 앞코를 슬쩍 내려줌으로써 사사사악 미끄러지듯 제동을 거는 것인데, 요 지점에서의 내공이 진정한 '뽀다구'를 만들어준다. 롤러맨에게 '뽀다구'는 중요한 미덕이었다. 롤러장에는 여학생들의 시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의상도 중요하긴 마찬가지. 지금의 스키니진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하체 곡선이 완연히 드러나는, 그러면서도 신축성이 뛰어난 '쫄쫄이' 스판 청바지, 여기에 깃을 살짝 세운 청재킷을 맞춰 입어줘야 롤러장 드레스코드가 완성된다. 물론 스판 청바지를 구입할 형편이 못된 내 경우, 누나로부터 물려 받은 검정색 쫄쫄이 골덴 바지로 만족해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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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근식 감독의 <품행제로>(2002)는 80년대 롤러장 분위기를 제대로 묘사했다. '죽순이 파숑'을 생생히 재현한 공효진의 자태를 보라!


아무튼 내가 롤러장 죽돌이가 된 것은 인간의 몸에 부착된 바퀴가 속도와 동작 반경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 넘게 해준다는 해방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롤러장은 그 자체로 최신 유행곡이 흘러나오는 일종의 음악감상실과도 같은 역할을 담당했는데, 꽤 큰 롤러장엔 디제이 박스까지 설치돼 있을 정도였으니 청소년들의 문화함양과 체력단련에 이보다 더 좋은 공간이 없었던 셈이다. 물론 그 또래의 남녀가 함께 모이는 공간이 다 그렇듯, 그곳조차 '부킹'의 장으로 적극활용하고자 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의 넘쳐나는 리비도 때문에라도 진정한 '뽀다구의 지존'들이 펼치는 롤러와 댄스의 절묘한 결합이 때때로 롤러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것이다.

조용필의 '못찾겠다 꾀꼬리'나 ABBA의 'Gimme Gimme Gimme'가 흘러나오면, 나는 신나게 코스를 돌았다. 그러나 혹독한 개인훈련을 통해 습득한 묘기(?)를 선보이기 위해선 다른 음악이 필요했으니, 그건 바로 Blondie의 'Call Me'였다. 디줴이의 탁월한 선곡에 의해 Call Me의 전주부가 흘러나오면 나는 기대고 서 있던 기둥을 힘차게 박차고 코스로 나오며 "칼러미야, 칼러베이베"를 외침으로써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어떤 '끼'를 끄집어내곤 했던 것이다. 여학생들의 므흣한 시선을 독점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며, 바람에 날리는 내 머리칼이 얼마나 멋질까 상상하며, 여덟 개의 바퀴가 내 몸을 열락의 경지로 실어다주는 듯한 짜릿함을 만끽하며.




...하지만 그건 단지 자위적 '뽀다구'에 불과했다. 내가 롤러장에서 '꼬신'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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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bikbloger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생각나는군요. 저희 동네에는 모던 토킹이나 joy의 음악이 많이 나왔던듯. 그런데 사진 속의 롤라장에 작은 오류가 있습니다. 저 바닥 재질은 90년도 중반 이후에나 있던 것이군요. 80년대라면 거의 초록색 원색에 가까운 폴리우레턴 바닥이 되어야 정확한 고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8.02.06 23:11
    • BlogIcon cinemAgora  수정/삭제

      헉! 바닥까지 세밀하게 살피시는 내공이라니, 진정한 죽돌이셨군요.^^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영화 찍으면서 바닥까지 고칠 여력은 없었던 듯.

      2008.02.06 23:20
  2. 알 수 없는 사용자  수정/삭제  댓글쓰기

    ^^ 아주 재밌는 글이었어요. 잘 봤습니다. ㅋㅋ (갑자기 선배의 롤라장 패션이 연상됩니다. 흐흐흐)

    2008.02.10 23:20
  3. 반조비  수정/삭제  댓글쓰기

    청량리 미주라이프로라장이 또오르네요^^

    2009.05.29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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