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즈'와 '뜨거운 것이 좋아' 사이

영화 이야기 2008. 1. 18. 11:55 Posted by cinemAgora
<뜨거운 것이 좋아>는 지난 2003년 개봉해 호응을 얻은데다 흥행에도 꽤 성공한 영화 <싱글즈>의  권칠인 감독이 내놓은 신작이다. 이상한 것은, 당시 <싱글즈>를 꽤 재미있게 본 기억은 있는데, 영화 내용이 도통 생각이 안나는 것이다. 이미 5년이나 지난 영화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렇게 영화 줄거리를 새카맣게 까먹다니, 스스로 이해가 잘 안됐다. <싱글즈>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후배 여기자로부터 대강의 줄거리를 전해 듣고서야 기억이 재조합된다. 그런데 그 기억의 재조합이래봤자, '아하, 그랬었지'가 아니라 '아, 그랬었나' 수준이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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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즈>, 2003, 권칠인 감독


생각해 보니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남성이라 그런 게다. 20대 후반 여성들이 통과해야 할 당장의 일과 사랑, 결혼과 출산의 문제가 절절하게 다가오지 못했던 게다. 그러니 영화 자체가 가진 통통 튀는 대사빨과 내러티브의 매력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영화가 남긴 잔영이 그리 크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로맨틱 코미디의 형식으로 제기되는 여성적 화두가 남녀를 불문하고 의미 있는 잔영을 남기기에는 한계가 있겠구나, '어쭈 참신한걸' 정도의 감흥을 남기고 이내 증발돼 버리는, 그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거기까지가 이들 영화들의 최대 기대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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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것이 좋아> 2008, 권칠인 감독


<뜨거운 것이 좋아> 역시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면서도, <싱글즈>처럼 일단은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세 여성이 하필 사탕을 핥고 있는 도발적 포스트 비주얼을 보고, 남자 잡아 먹고 싶어 안달이 난 여성들의 이야기겠군, 이라는 짐작을 하셨다면 살짝 오산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한 지붕 세 여성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 여성과 그녀의 언니와 조카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안소희가 연기한 당돌한 10대 소녀 강애와 이미숙이 연기한 쿨한 40대 커리어우먼 영미는 오히려 양념처럼 보일 정도로 이 영화의 무게 중심은 김민희가 연기한 27살 시나리오 작가 '아미'라는 캐릭터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바람 피운 남자 친구를 사정 없이 린치하고, 그래도 지지리 궁상 울먹이며 남친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복수심에 불타 맞선 본 남자와 술 기운 핑계 삼아 원나잇 스탠드를 감행하는 아미는, 그러나 사랑이 전부일 수 없는 여자다. 1년째 영화화되지 못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여관방에 갇혀 고치고 또 고쳐야 하는, 꿈은 있되 그 꿈이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빈곤한 청춘이다. 백수 남친은 불행히도 그녀를 빈곤에서 탈출시킬 수 있는 백마 탄 왕자가 아니다. 되바라진 고딩 조카 강애, 돈 잘 번다고 목소리 한껏 키우는 언니 영미는, 그런 그녀를 하숙생 취급하고, 남루한 현실은 자꾸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탄탄한 현실감을 바탕으로 한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그러므로 아미를 둘러싸고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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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즈>의 아주 중요한 미덕 가운데 하나였던 '우정'이라는 가치가 이번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술 한잔 걸치고 어깨 동무하는 장면을 삽입하긴 했으되, 영화 내내 세 여성은 서로의 문제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미는 제 코가 석자이고, 40대 영미는 고맙게도 폐경기의 자신에게 들이대준 연하남을 어떻게 처리할까 궁리하고 있다. 10대 강애는 남자친구와의 스킨십 도전에 집착하다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러니 이들이 함께 모여 고민을 토로하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을 뿐더러, 나오더라도 질책과 격려가 아닌, 책망과 냉소만이 감돌 뿐이다.

결국 영미는 아미에게 방 한칸 내줄 수 있는 부자 언니일지언정, 아미의 진정한 동지는 될 수 없다. 사회적 지위와 계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쿨'을 신봉하는 영미 입장에선 하릴 없이 자신의 집에 얹혀 사는 아미는 백마 탄 왕자에게 여성적 주체성을 헌사하거나, 그게 싫다면 능력도 없으면서 별볼일 없는 자존심만 꼿꼿이 세우고 있는 한심한 청춘일 뿐이다. 10대 강애는, 이모 아미가 발딛고 선 처절한 현실이 곧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음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녀는 엄마의 계급 의식을 수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끼리의 우정과 연대는 파편화된 가족 관계 안에서 의미를 잃는다.

아미는, 옆방의 교성을 참고 견디며 시나리오를 고쳐 써야 하는 여관방처럼 온갖 럭셔리한 상품 사회의 교성이 좌우로 난무하는 현실에 땡전 한푼 없이 유폐돼 버린 저주 받은 청춘이다. 게다가 아미는 누구의 도움 없이 지옥 같은 20대를 견뎌야 한다. 아니면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마침 나타나 운 좋게 하룻밤을 보낸 백마탄 왕자와 함께 이 땅을 떠버리든가. 그런데 그건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라고 아미도 생각한다. 구태의연하지만 절실한 갈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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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즈> 2003, 권칠인 감독


<싱글즈>로부터 이 영화까지 5년의 시간의 흘렀다. <싱글즈>가 결혼보다는 일, 사랑보다 우정에 끌리는 잠재적 골드미스들의 주체적 선택을 멋지게 그려낸 영화였다면, <뜨거운 것이 좋아>는 주인공 아미를 남루한 현실에 도도한 추함으로 남을 것이냐, 추한 도도함 속으로 벗어날 것이냐의 실존적 선택의 순간으로 이끈다. 어쩌면 <싱글즈>의 나난과 동미가 나이가 든다면 쿨하다 못해 얼음장 같은 아줌마 영미처럼 됐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때와 달리 지금의 20대에겐 쿨하다는 것조차 사치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 5년 사이에 세상이 꽤 많이 변한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 남성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이 정도다. 아마 여성 관객들의 경우 더 공감하거나 아니면 더 실망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겠지만, 어쨌든 아미의 처지가 머리로는 이해돼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 나로선, <싱글즈>처럼 이 영화의 줄거리 역시 몇 년이 지나면 가물가물하게 잊혀질 것 같다.

<서프라이즈> 이후 6년만에 스크린에 컴백한 김민희의 연기력은 '재발견'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꽤 농익었다. 이 영화는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서 김민희의 존재감이 가장 확실히 드러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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