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학원가)의 황당한 저주

별별 이야기 2007. 11. 25. 20:59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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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황당한 저주> 에드가 라이트 감독, 영국, 2004


어김 없다. 오늘도 좀비들은 거리를 습격했다. 새벽 1시. 똑같은 옷을 입은 좀비들이, 그들 세계의 관용어인 것으로 보이는 '존나'라는 단어가 꽤 많이 섞인 언어로 재재 거리며 사방 팔방의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다. 쾡한 눈, 무척이나 허기져 보이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대로 주변 음식점들을 기습한다. 별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듯 이미 거리 바깥까지 가판을 내어 '붉은 물이 든' 무언가를 잔뜩 내놓은 음식점들. 좀비들은 선혈과도 같은 붉은 국물을 뚝뚝 흘리며 게걸스럽게 먹는다.

삽시간에 인도를 장악한 좀비들은 마침내 차도를 장악한 수 십대의 버스 안으로 쓸려 들어간다. 일군의 다른 좀비들은 차도를 거의 완전히 막고 늘어서 있는 자가용차에 실린다. 그렇게 좀비들이 사라졌지만, 방금 그들이 쏟아져 나왔던 건물 안에는 여전히 소수의 좀비들이 남아 있다.

건물 벽에는 수 백여 명의 좀비들이 나란히 찍혀 있는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외고 2백명, 민사고, 영재고 5명 합격' 이건 필시 좀비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암호임에 틀림 없다. 옆에는 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 '왜 12살에 토익을 시작해야 하나?" '12'라는 숫자와 '토익'이라는 단어의 연관성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역시 좀비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암호일 것이다. 흠...글귀 너머 12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 좀비가 여전히 학원 로비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새벽을 지새우며 정글의 법칙을 새기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는 꽤 유명한 학원가 밀집 지역이다. 약 1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 양쪽에 빼곡하게 학원들이 들어차 있다. 간혹 인적이 드문 늦은 밤 거리에서 호젓한 산책을 즐기곤 하는 나는, 부지불식간에 학원가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당황하곤 한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갑자기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학원 수강생들의 인파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고교생이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중학생들이다. 그리고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가 아이 티를 벗지 못한 학생이나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끼어 있다.

자라나는 꿈나무들을 '좀비'에 비유했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내 눈에 가끔 그들은 좀비(살아 있는 시체)처럼 보일 때가 있다. 새벽 1시가 넘는 시각에 집이 아닌 학원에서 공부를 한 뒤 떼로 학원 버스나 부모가 몰고 나온 승용차에 실려 귀가하는 중고등학생들의 모습은, 도저히 내가 가진 '상식의 영역'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래서 학교에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침 8시 등교라면 적어도 7시엔 일어나야 할텐데, 집에 가서 씻고 어쩌고 하면 2시에나 잠들텐데, 그러면 5시간도 못자고 학교에 가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근 본 TV 시트콤에서 학원에 와서 졸고 있는 학생에게 강사가 "너 학교에서 뭐 하고 학원 와서 자!"라고 호통 치는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통찰적인 대사였던 셈이다.

지금 사교육의 팽창이 어느 지경까지 와 있느냐를 교육 현실의 구조적 모순과 연계해 시시콜콜 따지고 있는 일은 멍멍이 귀에 맹자왈 공자왈 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이니, 과문한 나까지 가담할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다만 이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나는 제 정신이 아닌 것을 넘어 미쳐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눈 맑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을 새벽 거리의 쾡한 좀비로 만들고 있는 현실이 무섭고 식겁할 뿐이다. 얼마전에도 한강 남서쪽 좀비들의 반란이 신문 지상을 뜨겁게 달궜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채택하지 않은 교육 주체들의 사고 체계에는, 이기느냐 지느냐, 밟느냐 밟히느냐, 목소리를 키우느냐 줄이느냐, 미느냐 밀리느냐, 붙느냐 떨어지느냐의'정글 함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니 별 일 아니라고 치부해 버리면 속 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무섭다. 이런 상황이 내일도 계속될 것 같기 때문에 무섭다. 쾡한 눈으로 새벽을 지새운 결과,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을 유일무이한 생존 원리로 체득하게 된 꼬마 좀비들이 미래의 권력을 쥐게 될까봐 무섭다. 그래서 훔치고 떼먹고 속이고 말바꾸기로 일관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글 법칙의 달인들, 죽여도 죽여도 선거때마다 되살아나 비치적거리며 걸어오는 저 늙고 흉측한 좀비들의 유전자를 상속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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