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특별했던 여행

애경's 3M+1W 2007. 11. 17. 02:5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얼마 전 회사에 불타는 사직서를 날렸어요. '행복한 삶을 위한 다운시프트'를 더 늦기 전에 실천에 옮긴 셈이죠. 아직까지 단 한 점의 후회 없이 무탈하고 평안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으니, 스스로의 씩씩한 결단에 칭찬 세레모니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하지만 욕심 내서 잔뜩 움켜쥐고 있던 두 주먹을 확 펼쳐버리면서, 단 하나 놓쳐버리기 아까운 것이 있었죠. 바로 최소 1년에 3회 가량 다른 나라를 다녀올 수 있는 출장 기회였어요. 하기사. 모든 경비를 업체나 여행사, 관광청 등에서 제공했던 몇 년 전과는 달리, 최근엔 출장 경비를 진행 기자가 직접 조달하는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어 예전같은 '마님 출장'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질 않죠. 적게는 몇 백 많게는 몇 천의 예산을 땡기기 위해 이런저런 업체에 앵벌이를 해야만 하는데다가, 심지어 스타 한 분이라도 모시고 가게 되면 차라리 '내 돈 내고 여행가는 게 낫지' 싶을만큼 이가 갈리고 피가 마르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답니다. 뭐, 뭐, 그렇습니다만! 어쨌거나 출장을 빌미로 세계 다양한 나라를 다니며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놓아버리기 아까운  기자 생활의 당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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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배우 재키 챈, 그리고 천국의 아이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소득...

출장마다 성격이 달랐으니 어느 한 곳만을 콕 찝기가 좀 그렇지만... 그래도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을 꼽자면 영화산업을 취재하기 위해 2002년에 다녀왔던 이란이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턱시도> 월드 프리미어 차 할리우드에서 만났던 우리의 성룡, 재키 챈이에요.
(저는 저 위 사진을, 가보로 물려줄 예정이랍니다. 흐흐흐)

그러나 그 어떤 출장보다 제 마음을 가장 평화롭게 만들어 준, 그야말로 천국으로 떠난 것처럼 일정 내내 몸서리치게 행복했던 곳은, 바로 호주 멜버른이었어요. 지금까지 모두 3번을 방문했지만, 갈 때마다 다른 얼굴의 도시를 만났답니다. 기본적으로는 조용하고 평화롭고 여유로운 느낌! 겉으로는 밝고 화려해 보이나 자기만의 외로움이나 고민이 있는 그런 이중적인 모습의 사람들이 오면, 자신과 닮아있는 이 도시의 묘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갖게끔 만든 곳이랍니다. 그 중에서도 최고는 단연 '모닝턴 패닌슐라'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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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낮과 밤, 어둠과 밝음

사실 냉정해 보이거나, 무료해 보이거나, 화 나 보이거나, 싸가지 없어 보이거나, 불평불만 가득해 보이거나, 머리에 똥만 차 보이거나, 가끔 나사가 풀려 보이거나 하는, 남들이 목격했다는 제 얼굴을 저만 모르고 삽니다. 불행 중 다행이죠. 고통이나 번민은 자각하는 순간 시작되니까요. 다행히도 무심하게 이를 닦거나, 피부 노화를 걱정하며 수분크림을 듬뿍 바를 때나, 퇴근 전 혹여 팬더가 되지는 않았나 아이라인 상태를 체크할 때를 제외하곤, 거울 볼 일이 거의 없어요. 그러니 입구 좁은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만큼이나 볼썽 사나운 낯짝을 직접 확인할 기회도 많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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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번이 속고 마는 건 그 때문인 듯 싶습니다. 가끔 사진 속 얼굴을 확인할 때면, 그 기념비적인 찰나의 기록이, 놀라우리만치 생기 넘치게 음각된 표정이 평소의 내 것인 양 믿고 말거든요. 멜버른에서 건진 이 한 컷의 사진만 해도 그래요.
한적한 시골의 라벤더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원료로 끓인 차와 비스킷을 먹으며 여유를 즐기는 시간. 멋 부리지 않은 소박함이 시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던 찰나를 운 좋게 잡아낸 이 사진을 보노라면, 어쩌면 나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마에 ‘평온’이라는 단어를 새기고 태어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정중동의 상태. 평생을 이런 표정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패리스 힐튼 따위 하나도 부럽지 않을 텐데 말이죠. 멜버른에서 데이투어로 떠났던 모닝턴 패닌슐라는, 그야말로 제 생애 가장 특별한 순간으로 기록됐답니다.


오전 8시 이전에 멜버른 시내의 몇몇 유명 호텔을 돌며 예약 관광객을 픽업한 뒤 모닝턴 반도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면, 네드랜즈 라벤더 농장, 써니릿지 딸기 농장을 거쳐, 애쉬콤 메이즈 앤 워터 가든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뒤, 아서즈 꼭대기와 모닝턴 보트 항구를 거쳐 오후 5시쯤 다시 도시로 돌아오게 되죠. 흥미로운 건, 출발부터랍니다. 15인승 크기의 버스는 픽업 포인트를 돌며 말레이시아에서 온 가족, 미국에서 온 노부부, 싱가폴에서 온 연인, 중국에서 온 중년 부부, 파리에서 온 게이 친구 등 다양한 구성으로 각국에서 떠나 온 여행자들을 싣게 되죠. 조금은 어색한 조합이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핑계 김에 인종 불문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요.

가이드를 겸하는 멋쟁이 기사 양반의 리드 하에 간단한 자기 팀 소개가 끝나갈 무렵,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게 되구요. 해수면에 반사된 햇살이 참빗으로 곱게 빗어 내린 흑단처럼 찰랑거리며 대지로 흩뿌려지고, 길가를 따라 늘어선 보헤미안 스타일의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하루를 여느라 분주히 술렁이죠. 침착하고도 신비로운 아침공기를 뚫고 달리다 보면 커다란 통유리로 전면을 처리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근사한 별장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요. 갑부들의 별장 혹은 밀회 장소라 하더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로맨틱한 저 곳에서 사랑을 나누면, 보다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아마도.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게 낯설고도 아름다운 풍광들에 매료당하며 1시간 가량 달리면 첫 목적지인 네드랜즈 라벤더 농장에 도착하게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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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라벤더에 코를 파묻고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 각기 다른 수많은 종류의 라벤더가,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저 멀리까지 풍성히 피어 올라 있었죠. 수천 수억 개의 꽃송이들이 뿜어내는 향기는 가히 천국의 것이었어요. 여행객을 반겨 맞은 라벤더 농장 주인이 라벤더와 농장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지만, 영어 공해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 패스. 아무렇게나 들이대도 작품이 되는 라벤더 사진을 찍으며 농장을 쏘다녔죠. 이곳에선 허브티와 라벤더 비스킷을 제공하며 라벤더를 원료로 한 갖가지 제품들을 살 수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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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버스에 올라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따라 30분 가량 달리면 써니 릿지 딸기 농장에 도착하게 되죠. 여행객들이 도착하면 딸기 농장 스태프는 조그만 플라스틱 바구니와 신발 위에 덧신을 비닐 부츠를 나눠줘요.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비닐 부츠를 신고 밭에 들어가 딸기를 따게 되는데, 샐러드 바 이용하듯 기술적으로 쌓아 올리면, 획득한 딸기를 모두 본인이 먹거나 가져갈 수 있죠. 시골 아낙이라도 된 듯 한동안 열중해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답니다. 게다가 후후 먼지 불어가며 곧바로 입 속에 딸기를 쏙 넣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죠. ^^
이 곳에서도 역시 딸기를 재료로 한 온갖 제품과 식료품, 와인을 구입할 수 있어요. 동행했던 미녀 스타일리스트 희원은, 갓 태어난 조카에게 줄 딸기 양말과 모자를 구입키도 했죠. 어쨌거나 농장 안 카페에서 초콜릿 턱시도를 입은 딸기와 함께 카푸치노 한잔을 마시는 순간도 정말 호사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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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애쉬콤 메이즈 앤 워터 가든. 이 곳은 장미정원, 미로정원 등 다양한 테마의 정원을 호주의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조성해 놓은 레스토랑이에요. 이곳에선 다진 양고기를 안에 넣어 만든 따끈한 파이를 메인으로 2가지 코스 요리가 점심으로 제공되죠. 인간의 솜씨로 완성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웅장하고 정교하게 완성된 정원을 바라보며 먹는 별식은 그야말로 아트의 경지였어요. 그곳이, 그 순간이 바로 천국이었죠.
마지막으로, 내려다보이는 뷰가 끔찍이도 멋진 아서즈 꼭대기를 지나 호화로운 요트들이 정박된 모닝턴 항구를 거쳐 다시 도시로 돌아왔답니다. 각 포인트마다 15분 가량의 자유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순간 주어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는 정말 평생을 살면서 그리 자주 얻지 못할 특별한 선물이었어요. 설경구처럼 외치고 싶어요. "나 다시 돌아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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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 투 해븐. 멜버른의 모닝턴 페닌슐라....
시간이 잠시 멈춰버린 듯한 순간, 마음을 비우고 느리게 걷기 시작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죠. 느림의 미학과 우연의 음악이 웅장하게 가슴에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자연이 준 평화로움이 행복이라는 감정으로 온 몸에 사무치던 그 순간, 새삼 깨닫게 되더군요. 인생은 정말 열심히 한번 치열하게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것을. 그곳에 다녀오면 아마 누구든 시인이, 소설가가 되어 기록하고 싶어 안달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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