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위와 그를 추억함

영화 이야기 2007. 11. 16. 00:59 Posted by cinemAgora
<색, 계>의 양조위에 빠져든 분들 주변에 많다. 그들과 양조위의 매혹을 공유하기 위해 필자가 4년 전 <무간도>의 홍보차 내한한 양조위를 인터뷰한 뒤 FILM2.0 인터넷 사이트에 실었던 묵은 칼럼을 끄집어 낸다. 참고로, 글 중에 나와 함께 땡땡이를 쳤던 선배는 지금 모 언론사 스포츠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영화 <씨클로>를 봤던 기억이 난다. 96년이었던가, 방송국의 스포츠 뉴스 AD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매일 밤 생방송을 위해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게 고역이었던 차에 하루는 PD를 맡았던 선배가 제안을 해 왔다. 방송을 세 시간 여 남겨 놓고 갑자기 <씨클로>를 보러 극장에 가자고 하는 게 아닌가. 마침 저녁 경기가 없었던 날이었으므로 방송 준비는 대충 마무리 돼 있었던 지라 흔쾌히 선배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회사에서 약 10분 거리에 떨어진 극장에서 마지막 회 입장권을 사 <씨클로>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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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클로, 1995

한 해 전쯤 봤던 <중경삼림>의 강렬함을 잊지 못했던 나는 끈적끈적한 베트남 호치민시의 거리를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매춘을 강요해야 하는 시인으로 분한 양조위의 그 비애 가득한 눈빛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을 고스란히 담아내던 그는 자신에게 드리운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기야 불꽃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 처절함과 처연함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즈음, 문득 방송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영화는 끝날 줄 모르는데 시계를 보니 생방송 30분 전이 아닌가. 내 재촉에 못 이겨 아쉽게 자리에서 일어난 선배는 끝내 극장 문을 나서지 못하고 작게 속삭였다. “엔드 크레딧 올라갈 때 뛰기 시작하면 방송 5분 전에는 회사에 도착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보자. ” 바로 뛸 채비를 하고 문 옆에 달라 붙은 채 우리는 <씨클로>의 남은 부분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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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1994

다행히 그날 방송 사고는 없었다. 생방송 2분 전에 도착한 우리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진행을 끝냈고, 영화도 보고 방송도 무사히 끝낸 데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일은 다음 날 아침에 벌어졌다. 부장에게 불려 간 우리의 눈 앞에는 ‘선동렬, 10세이브’(로 기억된다)라는 대문짝만한 헤드라인의 스포츠 신문 세 장이 던져졌다. 우리가 <씨클로>를 보고 있는 사이, 당시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맹활약 중이던 선동렬 아저씨는 또 하나의 세이브를 올렸던 것이고, 생방송 2분 전에 도착한 우리에겐 당연히 그 뉴스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부장에게 실컷 깨지고 나오는 길에 선배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양조위의 <씨클로>를 봤는데 이 정도면 약과지, 안그래?”

지난 화요일, 그 때 뉴스를 빼 먹어 부장에게 혼나게 만들었던 장본인, 그 끈적끈적한 비애감으로 온통 가슴 속을 헤집던 장본인을 7년여 만에 처음으로 직접 봤다. <무간도> 홍보차 한국에 온 양조위를 시내 한 호텔에서 인터뷰했다. 그에게 ‘내가 당신 영화를 보려고 얼마나 곤욕을 치른 줄 아느냐’며 옛 해프닝을 자랑처럼 늘어놓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으나 인터뷰 일정에 쫓기는 그에게 그런 얘기 했다간 욕 먹기 십상일 듯 했다. 직접 만난 그는 꽤 왜소했다. 170센티미터가 넘지 않을 것 같은 키에 깡 마른 체구는 <화양연화>의 그 젠틀한 매력이 사기였군, 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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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2000

턱과 코 밑을 듬성 듬성 덮고 있는 털이 아니었다면 “그 양반, 참 예쁘장하게도 생기셨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유약한 표정. 동료 배우 유덕화와 나란히 앉은 그는, 유덕화의 유창하고 또렷한 대답이 흘러 나오는 동안 손에 쥔 꼬깃꼬깃한 종이 한장을 양쪽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내내 만지작 댄다. 못 알아 듣는 중국어이니 망정이지, 질문을 해도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울컥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그 깊은 눈의 소유자는 같은 남자의 시선으로 봐도 확실히 매력적이다. 유덕화에겐 미안한 얘기이지만 그가 대답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난 슬쩍 슬쩍 양조위의 표정을 살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나,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고심하는 듯한 그는 최대한 말을 아낀다. 그날 그의 말투는 꽤 진중하고 느렸는데, 그런데도 통역사는 그가 <영웅>의 흥행 소식을 전해 듣고 고무됐는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라고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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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도, 2002

생각해보니, 양조위의 매력은 그 본연의 모습이 그가 맡았던 영화 속 캐릭터들의 현시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자기 방에 팬티 차림으로 누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중경삼림>의 실연당한 순찰경, 표정 없는 얼굴로도 한 없는 고통을 표현하던 <씨클로>의 불행한 시인, 금지된 사랑을 앙코르와트의 구멍 속에 속삭여 잠가 버렸던 <화양연화>의 남자가 한 인물에 고스란히 녹아 거기 앉아 있었다. 그의 몸집과 표정은 그 자체로 세상의 질서에 지쳐 있는 비애감의 여러 스펙트럼을 미분해 받아 안고 있는 듯 보였다. 칸 영화제가 인정한 그 세계적 배우는 그렇게 당당하지도, 그렇게 세련되지도 않은 인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스타 배우들이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와는 전혀 상관 없는 표정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것 자체가 엄청난 카리스마로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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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2003

인터뷰 중 한국에서 40대 이상의 배우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데 대해 말들이 오갔는데, 유덕화는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약간 흥분한 기색이었다. 또 한번 유덕화에게 미안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양조위의 견해는 조금 더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는 “아시아 대중 영화 시장이 아이돌 스타 위주로 흐르다 보니 아시아 전체가 그런 경향을 갖게 되는 것 같다”면서 범위를 넓혔다. 그리고는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폭이 너무 좁은 것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배우로서 그의 자의식은 보다 넓은 범위의 조감력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인상. 게다가 차근 차근 작은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그의 말투는 주저함이 있거나 모호하지 않다. 오히려 명료하고 설득력이 있다. 인간의 표정을 한 그 연약해 보이는 배우가 왜 대배우가 됐는지 실감케 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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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2007

양조위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예전 <씨클로>를 함께 봤던 선배가 떠올랐다. 그는 그 이후 정치부 기자를 거쳐 뉴스 앵커로 맹활약 중인데, "갑자기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는 익살스러운 장난 메일을 내게 보낼 정도로 지금도 여전한 영화광이다. 아마 요즘도 생방송을 앞두고 극장을 찾다가 부장에게 혼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양조위를 만났다고 하면 그는 분명 격세지감이 들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도 양조위와 마찬가지로 얼마전 불혹의 나이가 됐다. 곧 그에게 메일을 보내려 한다. “선배, 내가 <씨클로>의 양조위를 만났는데, 그 때 부장에게 깨진 건 정말 약과였네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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