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꿈이 뭐야?

애경's 3M+1W 2007. 11. 14. 01:5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정말 징글맞은 이틀이었습니다. 이번 주는 얼마 전 백일을 맞이한 딸아이에게 충성을 다하는 주간! 일절 외출이나 미팅 등을 삼가고 아이를 맡겨둔 친정에서 개기며 늘어진 티셔츠와 무릎 나온 '추리닝'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다운 일상을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니네 세째 아이가 독감에 걸려 외할머니 집으로 긴급히 실려온 겁니다. 언니는 현재 12월 출산예정인 네째를 임신 중인 만삭의 몸인지라, 이래저래 아픈 조카 녀석은 할머니 차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한데 이 녀석 감기가 제 딸아이에게 전염된 겁니다! 감기를 떨군 18개월 된 조카녀석은 기운이 왕성해져 온 집안을 다 헤집고 다니며 말썽을 피우고, 감기 접수한 제 딸아이는 온 몸에 열꽃이 핀 채로 잠 못이루는 지난 밤을 보내야 했죠.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이틀이 지났고, 오늘 드디어 언니가 조카녀석을 보러 친정집에 왔습니다.
아이를 케어할 지원군(?)이 도착하자 엄마는 병원이며(역시 몸살이 나셨네요) 미뤄뒀던 볼 일을 보러 나가셨죠. 30분이면 족할 용무라 생각했는데 1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시질 않자 언니가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답니다. 엄마는 여차저차 찾아오신 손님과의 자리가 길어져 아예 저녁을 드시고 계신다고 했어요. 순간 언니와 전 뾰족해졌죠. "아니 지금 이런 순간에 꼭 저녁까지 드셔야 해?!?" "그러게 전화도 안하고 뭐야, 정말." 아픈 아이들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다들 너무 피곤하고 예민해져 있어서 더 섭섭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자매는 우리끼리 궁시렁거리는 데 그쳤고, 엄마에게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 자매는, 엄마에게 입 뻥끗 못하는 입장이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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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yworld.com/woogallery

2년 전쯤. '여자의 일생'이라는 주제로 특집기사를 하나 준비하면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의 저자이자 한의사인 이유명호 선생님을 인터뷰했던 적이 있습니다. 10대는 초경, 20대는 첫 경험, 30대는 임신과 출산, 40대 이후는 폐경 하는 식으로, 여자 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완성했었죠. 여자 몸에 그렇게 좋다는 추어탕을 먹으며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뒤, 느껴진 바가 있어 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었죠.

다자고짜 물었습니다. "엄마는 꿈이 뭐야?"  엄마는 말했죠. "너랑 니 언니랑 행복하게 사는 거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랑 아빠가 니들에게 큰 피해 안주고 아프지 않게 사는 것"


저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물었어요. "아니 그런 거 말고, 엄마 꿈 말야, 엄마 꿈.... "

한참 대화를 이어나가자 그제서야 엄마는 제가 원하는 답을 들려줬어요. '절대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말이죠.
"그냥 지금 배우는 거(장구를 배우고 계셨었죠) 더 잘해서, 공연도 좀 하고, 이걸로 사람들 즐겁게 해주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거, 뭐 그 정도?"

연이어 또 물었죠. 엄마 내가 엄마 꿈은 뭐야? 라고 물으니까 기분이 어때?
"기분? 좋지~ 좋아!" 왜 기분이 좋아?
"그냥 딸네미가 엄마 생각을 많이 해주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기분 좋아."

평소 엄마와 절대 이런 류의 대화(는 커녕 대화하는 거 자체를 싫어하는 딸네미였다)를 해본 적이 없어 조금 쑥스러웠던 기억. 하지만 엄마는 "엄마 꿈이 뭐야?"라는 딸네미의 무심한 질문이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받아들여져 마냥 행복했다고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얘기, 이런 순간에 써도 되는 걸까요? ^^ 어쨌든 영양가 있는 대화였답니다.

모두 이유명호 선생의 조언 덕분이었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라. 당신 꿈은 뭐냐고. 만약 없다고 말한다면, 그녀에게 꿈을 만들어 드려라. 앞으로 30년은 더 사실테니 말이다. 그리고 '죽는 그 날까지'가 아니라 '사는 그 날까지'다. 사는 그 날까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은, 꿈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행복하다. 자신도, 엄마도, 그리고 딸도."  

그날의 짧은 통화는 '죽는 날만 남았지'라던 엄마의 마인드를 '사는 그날까지'로 바꿔드렸답니다. 이후 전 엄마의 꿈에 약소한 금전적 지원을 해드렸고, 엄마는 취미로 배우던 장구를 효대학원 과정 수료로 전문화(?) 시키셨죠.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거라던 엄마의 꿈은, 불과 2년 만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이후 동사무소에서 강의도 하시고, 노인분들 찾아다니시며 봉사 공연도 하시고, 틈틈이 크고작은 무대에 오르기도 하셨어요. 그야말로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로 일생을 바친 한 여자가, 낼모레 환갑을 앞두고 봄날을 맞이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런데, 한창 물 오르던 마당에 덜컥 언니의 늦둥이와 예정에 없던 제 딸아이가 등장한 것이랍니다. 게다가 우리 자매 모두 엄마의 지원 없이는 어찌 육아를 해결할 도리가 없는 상황이고 말이죠. ㅡ.ㅡ;;

물론 '천상 엄마'인 우리 엄마는, 스스로를 마인드컨트롤하듯 반복적으로 말하십니다. "내 새끼들 내가 키워줘야지. 외부활동 줄여야지.... 내가 당연히 해줘야지...." 들을때마다 죄송스러워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만, 왠지 자꾸만 '강의 하고 싶어, 공연 하고 싶어... 더, 더, 더 하고 싶어'라는 아쉬움과 미련의 표현으로 들리는 건 왜인지. 제 딸아이와 언니의 늦둥이들이 앞가림 할 수 있는 시기가 온다한들, 과연 그 이후 엄마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며칠 전 새벽 낚시터에서 만났던 한 어르신의 말씀이 잊혀지질 않네요.
"부모님들은 기다려주질 않는다네. 그러니 계실 때 잘해드리시게."
철 드나 봅니다. 아니면 엄마가 되서 그런가... 어쨌든, 요 며칠간 친정에서 개기면서 엄마를 지켜보노라니 아주 만감이 교차합니다. 꽃 같던 엄마가 정말, 쭈글쭈글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는데... 엄마니까, 엄마라서, 엄마이기 때문에, 이렇게 묻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ㅡ.ㅡ;;

우리 엄마 꿈은 이제 무얼까요.... 지금 이 순간,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혹 내일, 이 '육아의 전쟁터'에서 잠시 마주앉을 여유가 생긴다면,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일의 전쟁을 위해 이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네요.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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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작품과 마찬가지로 제가 참 좋아하는 박공우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출처는 cyworld.com/woo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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