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영화 말고도 분노할 게 많다

영화 이야기 2007. 11. 9. 00:02 Posted by cinemAgora
평점 권력의 반문화성을 성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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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이명세 감독의 영화 <M>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다. <디 워> 파문 때와는 정반대의 양상이지만, 또 다시 영화를 둘러싼 옹호와 비판(혹은 저주)의 격돌 양상은 비슷한 것 같다. 이번에는 ‘평론가들의 가르치려는 오만한 자세’에 덧붙여 ‘관객을 무시하는 감독의 태도’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번에는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논란의 물꼬가 터졌다는 것이다. <디 워>가 애국심 마케팅을 동원한 여론몰이 등 영화 외적인 부분에 치우치면서 소모적인 헐뜯기로 일관했다면, <M>은 영화를 받아 들이는 개별 관객의 반응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건설적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현상은 여전하다. 이 글이 <M>을 비평적으로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므로, 나는 영화라는 매체를 바라보는 이 시대 대중 관객의 인식과 그것이 확산되는 과정의 모순에 집중하고자 한다. 대중 관객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적합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관객들이 스스로를 ‘대중’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키고, 정치인 등의 이른바 지도 계층이나 오피니언 리더, 혹은 소수 전문가 집단과 대립하는, 일종의 계층적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디 워> 파문은 그 설득력 있는 방증이었으며, <M>은 그 같은 문화적 징후가 더 이상 징후가 아닌 하나의 광범위한 현상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고 있다.

관객이 아닌 고객을 업신여긴 죄?

소비 자본주의는 대중을 일상의 고객으로 신격화했다. 그러므로 대중의 선택은 절대선처럼 추앙된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절대선인 척 얼러준다. 이런 숙명은 불가피하게도 대중문화의 소비 패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중성’이라고 통칭되는 ‘상업성’, 또는 ‘상품성’은 다른 어떤 미학적 기준을 압도하는 잣대로 기능하고 있다. 숙명적으로 대중추수주의에 함몰된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은 여기에 강력한 알리바이를 하나 개발해 냈다. 평점이라는 수치를 통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이다. 별점 매기기는 원래 영화에 대한 비평가들의 시각을 관객들이 일별하기 쉽도록 최대한 간단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도입된, 일종의 저널적 선정성의 결과물이었다. 때문에 비판도 많았지만, 관객들이 길고 난해한 평론보다 짧고 간단한 요약문을 선호할 것이라는 가설은 이 우스꽝스러운 도표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별점이 평점으로 둔갑해 네티즌들의 손에 들어가자, 금세 전가의 보도가 됐다.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이 네티즌 평점은 영화의 상업적 성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반응을 최대한 단순화해 보여주는 이런 방식은, 기존 언론들이 선정적으로 써 먹던 수법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쉽게 권력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 권력을 고안한 당사자인 언론은 자기 꾀에 넘어간 셈이고, 네티즌은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는 셈이다. 평점은 관객 일반의 반응이 아니라 영화의 품질을 따지는 점수가 됐다. 그래서 평점이 낮은 영화는 별로인 영화, 평점이 높은 영화는 좋은 영화다. 그러다 보니 많은 네티즌들이 평단에 대립각을 세우는 근거로 평점을 들이댄다. 평점이 이렇게 낮은데, 당신들은 무슨 근거로 영화를 그렇게 좋게 얘기하는 것이냐, 혹은 평점이 이렇게 높은 영화를 깎아 내리는 저의는 무엇이냐 등등.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아예 평점 권력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믿는다.

평점의 공식: 점수 낮은 영화=나쁜 영화=쓰레기

개봉하자마자 5점대의 처참한 평점을 얻으며 부산국제영화제 때의 화제와 상찬을 무색케 한 <M>의 경우, 그러므로 나쁜 영화인 셈이다. 평점이 낮다는 것은 대중성이 없다는 것이며, 평점 권력의 논리에 따르면 대중성이 없는 영화는 영화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관객들이 이 논리를 들이댄다. 영화는 어차피 상업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명세가 자아 도취에 빠져 이상한 영화를 만들어 놓고 관객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갔다고 말이다. 강동원이 나온다기에, 영상미가 끝내 준다기에 나름대로 기대감을 갖고 이 영화를 선택한 관객들로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당황한 것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대중 관객들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중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또는 영화가 낯설다는 이유로 그 고유의 가치와 상관 없이 영화를 쓰레기 취급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말할 나위 없이 관객의 선택은 절대선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고객인 자신이 재미 없었으므로 그 영화는 나한테 맞지 않거나 취향과는 다른 영화, 혹은 기대와는 핀트가 맞지 않는 영화가 아니라 그냥 쓰레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의 평점 권력은 그 생각에 발언의 기회를 준다. 그리고 생각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준다. 쓰레기라는 말은 생각을 떠나 실체가 된다. 영화가 기어코 쓰레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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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권력의 반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명세가 관객을 가르치려 들었다’고 훈수한다. 왜 ‘자기만 알아 듣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이게 영화야’라고 하냐며 내러티브의 결핍이 치명적인 오류라고 한 수 가르친다. 예술영화 만들 거면 (본인이 대중영화 전문배우라는 선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알아서 대중 배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강동원을 왜 캐스팅했냐고 지청구다. 한마디로 재수 없다는 거다. 논거는 간단하다. 영화 감독은 관객을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업의 종사자일 뿐이다. 그러니 예술가라는 쓸 데 없는 자의식은 버리라는 거다. 예술이 관객의 욕망과 대립된다는 건,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요설일까? 이 논리라면 영화 감독은 시나리오 쓸 시간에 소비자 분석부터 먼저 해야 할 판이다.

기형적 보수화, 증오의 타깃을 혼동하다

이처럼 낯선 영화에 대한 부적응이 쉽게 반감으로 치환되는 현상의 배후엔 앞서 말했듯 평점 권력이 도사린다. 그리고 그 권력은 인터넷 안에서만 매우 혁명적이어서, 이른바 전문가로 일컬어지는 모든 권위에 대한 냉소와 저주를 부추기고 있다.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그 냉소와 저주의 모티브가 단순한 의견의 상이함이 아닌, 잠재된 분노와 증오이기 때문이다. 타깃이 명확하지 않은 그 정서의 마그마는 약한 고리를 타고 분출된다. 영화는 그 마그마가 찾아낸 첫 번째 약한 고리다.

영화 <M>으로 시작했다가 너무 멀리 온 것 같지만, 기왕 얘기 나온 김에 몇 마디 더 보태고 싶다. 나는 <디 워>나 <M> 등을 통해 감지되고 있는 최근의 문화적 징후가 한국사회의 기형적 보수화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기형적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는, 이상의 정당성보다 수단의 실효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진, 이른바 집단적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현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부패를 먹고 커왔던, 게다가 한국사회의 기득권자들이 노골적으로 응원해 마지 않는 특정 정당에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계층적 이해나 토대와 상관 없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부패고 뭐고, 밥 먹고 살게 해주는 놈이 장땡이라는 근거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제 삼겹살은 먹게 됐으니 갈비살도 좀 먹게 해달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목전이지만, 여전히 성장주의의 가격이 공공성의 가치를 압도한다. 마치 평점이 영화의 가치를 압도하는 것처럼. 예술이 밥 먹여 주냐는 관객들이 돈 7천 원 냈으면 그에 합당한 상품을 내놓아야 할 것 아니냐고 윽박지르는 것처럼.

이 현상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정서가 있다. 그것은 무기력이다. 이상이 현실적 실효를 증명하지 못하자, 배신감은 새로울 것으로 기대됐던 기존 권위로부터 순식간에 등을 돌렸다. 등을 돌려야 할 타깃은 명확했다. 보수 언론이 끈질기게 부추긴 덕분이었다. 그러나 돌린 뒤 보이는 풍경은 모호하다. 그것이 무기력을 이끈다. 분노는 타깃을 구분하지 못하고, 약한 고리로 터져 나온다. 지성은, 그리고 대중문화는 가장 쉽고 편리하게 응징할 수 있는 분노의 타깃이 됐다.  

영화 <M>을 통해 이명세는, 대중을 가르치려 한 게 아니다. <M>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이 무식한 관객들을 계몽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유사 이래 있어 왔던 예술의 본원적 가치가, 상품 사회의 욕망에 그렇게 쉽게 몸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본주의적 예술의 숙명을 타고 난 영화 매체가 그나마 진화할 수 있었던 힘은, 순진하게도 그 영화 안에서 예술을 추구해보겠다고 애쓰며 자본과 관객들의 냉소에 맞서 싸워온 작가들이라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려 드는 것이다. 정해지지 않은 룰 바깥의 소통 가능성을 탐문해 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 풍경에는 분노와 저주보다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게 지당하다. 자본을 대신해 ‘대중성’의 채찍으로 예술가의 엉덩이를 때리고 있기에, 이 세상에는 분노할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11월 8일자 컬처뉴스(www.culturenews.net)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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