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영화가 중반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섹스신을 위한 거대하고 화려한 장식처럼 보였다.
박찬욱의 영화는 경향적으로 작가적 야심과 자본의 야심인 센세이셔널리즘의 경계 위에서 줄타기를 한다.
이번 영화에서의 레즈비언 섹스신을 프랑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그것과 곰곰히 비교해 보았는데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그 장면이 소박하지만 아름다웠다면 이 영화에선 남성 시점의 관음 욕망과 거기에 화답하려는 의지를 엿보았다. 그래서 나는 <아가씨>를 한편의 우아한 퀴어 포르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부르겠다.
어차피 이야기는 서양의 원작 소설에서 끌어 왔고 박찬욱이 한 일은 스릴러라는 장르적 재배치와 관음적 섹스신과 탐미적인 세트를 추구한 것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며 내가 박찬욱의 영화에서 슬쩍 맡게 되는, 타락을 의도한 부르조아 예술가의 허세의 냄새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확증을 얻은 것 같다.
그는 오로지 미장센을 위해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도 관념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창착자다. 미장센을 고민하시느라 시대의 고통조차 접목과 추상의 일본 정원처럼 동원하시는 "깐느박"인 것이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영국의 사회주의자 감독 켄 로치에게 돌아갔다. 적어도 그는 "깐느"가 아닌 노동자를 위한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장식도 거의 없고 소박하다. 영화의 진경은 돈 처들인 프로덕션 디자인보다 프로이트적 남근기의 수준에서 벗어난 예술가의 성숙한 시대 정신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