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저장고가 필요한 이유

별별 이야기 2013. 6. 6. 04:58 Posted by cinemAgora

내게 공개적인 공간에 글을 쓴다는 건, 언제나, 독자를 전제로 한다. 즉 읽는 이를 염두에 두고 하는 행위다. 어쩌면 이것은 직업적으로 글 쓰는 이의 강박인지도 모른다. 요즘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누군가에게는 독백의 장으로도 쓰이는 걸 보면, 내 지론이 약간은 낡아 보이기도 한다. 거창하게 말해 통섭과 융합의 시대라서 그럴까? 온라인 글쓰기는 점점 더 타인에게 말걸기와 혼잣말을 주절거림이 경계 없이 마구 혼재돼 있는 것 같다. 유비쿼터스의 시대다. 이런 시류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식의 서랍들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느낌도 든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무의식과 의식, 노출증과 관음증, 드러내야 할 것과 숨겨야 할 것 사이에서 무전략의 전략들이 횡행한다.

나는 조금 낡은 세대라서 그런지, 아무도 보지 않는 생각의 저장고라는 게 따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일기장 같은 거 말이다. 여기에다가는 생각의 파편들을 질서 없이 마구 휘갈길 수 있다. 욕설도 난무한다. 정제되지 않았기에 글이라고 보기도 민망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순전히 나만을 위한, 그러니까 오로지 나만이 독자인 나만의 온전한 기록들이다. 때론 그래서 기록이라기보다 배설에 가까운 것들도 있다. 이것은 유용하다. 생각이 한번쯤은 필터링을 거칠 수 있다. 즉, 찌꺼기가 걸러진다. 그렇다고 액기스만 남는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훨씬 낫다. 

따지고 보면, 독자를 전제한다 하더라도, 아날로그적 글쓰기는 사실상 고립된 노동이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철저하게 혼자가 아니면 안된다. 철저하게 혼자이되, 나중에라도 그 글을 읽을 독자를 온전히 머리 속에 담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기에, 노동의 생산과 그 결과물을 소비하는 시간차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고독과 번뇌에 시달려야 한다. 어쩌면 그 고독과 번뇌의 시간이 글 속에 녹아 들어가 글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비료가 되어주기도 한다.

반면,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곳의 온라인 글쓰기는 즉각적이자, 즉자적이다. 생각을 여과 없이 바로 바로 쓸 수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라고만 돼 있는 트윗을 전송한다. '아 졸라 욱겨' 같은 글도 마찬가지다. 아무 맥락이 없다. 독자를 전제로 하지 않는 대표적인 혼잣말이다. 그런데 왜 전송할까? 독자를 의식하지 않되 의식하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길 바라는 욕망이 전송이라는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다. 글쓰기가 고립된 노동이 아니라, 즉시적인 피드백을 구할 수 있는 '소통 행위'로 바뀌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온라인 시대에 사람들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말을 거는 것'이다. 

문제는 이 소통 행위 속에서의 말의 내용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고립무원의 아득함을 견뎌내야 하는 아날로그적 글쓰기와는 천양지차가 돼 버린 상황이지만, 듣는 이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생산과 소비의 시간차가 거의 의미가 없어진 대신, 우리는 누군가의 정제되지 않은, 즉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생각의 배설과도 대면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 즉, 우리는 누군가의 일기장을 억지로 읽게 되는 것이다. 그가 자발적으로 공개했기에, 나는 의지와 상관 없이 그의 일기장을 훔쳐 보는 자가 된다. 그 일기장에 별로 읽을 게 없을 때가 다반사이지만 말이다.

여기에는 분명 함정이 도사린다. 즉, 말을 하기 전에 한번쯤 더 생각해 보는 습관, 생각의 저장고에 잠시 묵혀 두어 조탁된 언어로 익을 때까지 기다리던 관습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얘기다. 온라인에 난무하는 언어들(혹은 맥락 없는 기호들)이 전자 담배의 연기처럼 찰나적인 쾌감만을 남긴 채 증발돼 버리고 마는 상황에서 듣는 이의 여운도, 말하는 이의 사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아무도 주의 깊게 말하지 않고, 아무도 사려 깊게 듣지 않는다. 그리하여 또 다른 차원의 고립감이 남는다. 그 고립감은 글을 쓰는 노동의 시간에 느끼는 고립감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생산을 전제로 한 고립감이 아니라, 즉각적 인터페이스가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실존적 틈새에 대한 확인이기에 더욱 뼈아프다. 

유비쿼터스 시대의 글쓰기, 또는 말걸기가 남긴 후유증이다. 이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다시, '노동'으로서의 글쓰기, 그도 아니라면, 생각의 저장고를 복원시키는 게 현명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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