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에 TV를 꺼야했던 이유

TV 이야기 2007. 9. 26. 01:28 Posted by cinemAgora
명절 연휴에 고향 갈 일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하릴없이 TV를 켜놓고 이른바 '재핑'이라는 걸로 소일하기 마련이다. 이 채널 저 채널 옮기다 보면 명색이 공중파라고, 그나마 얼굴 좀 아는 연예인들이 떼로 몰려 나온 명절 특집 방송이라는 걸 앞다퉈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세 편의 공중파 특집 프로그램을 보다가 질려서 TV를 꺼버리고 말았다. 하나는 신정아 학력 위조 사건에 고무(?)돼 학력을 주제로 토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개그맨 서경석이 사회자로 나선 겉모양부터 일단 신기해 보여 조금 봤는데, 고등학교를 중퇴한 연예인이 나와 학력보다 중요한 게 실력이란 걸 자신의 체험담을 통해 얘기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좀 가다 보니 가관이다. 거기 또다른 게스트로 나오신 고승덕 변호사. 서울대 법대 출신에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 패스, 예일대와 하버드대 석사라는 엄청난 학력의 소유자를 모셔다 놓고, 한편에선 학력보다 실력이니 어쩌구 하더니, 한쪽에선 진짜 학력의 진수가 어떤건지 얘기하고 있다. 위조하지 않고 진짜로 학력을 쌓은 그는,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 이런 자 앞에서 부끄러워 하라. 썩어 빠진 신정아여,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걸까? 수박 철도 지났는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박 겉을 단체로 핥고 있는 토론 프로였다.

변호사로서 고승덕의 수임률이나 승률을 우리는 알길이 없다. 그저 그가 고시 3개를 패스하고, 대한민국 국민까지 다 알고 있는 미국 명문대 학위만 3개를 가지고 있는 유명인이라는 것 밖에는. 애초에 교수를 꿈꿨다는 그 양반이 왜 그리 많은 명문대 석사 학위를 필요로 하게 된 건지 알 길이 없다. 과정이야 어떻든 그는 학력 중심 사회의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고, 또 자의든 타의든 그걸 바탕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에게 본질적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그렇게 공부가 깊은 법조인으로서, 얼마나 억울한 사람들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 오셨냐고.

그러고 보니 사회자로 나온 서경석에게도 아무도 이렇게 묻지 않았다. "당신은 말했죠. 내가 만약 학력 덕 봤다면 이 정도에서 머물렀을 것 같냐고.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보죠. 당신이 그나마 서울대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 별로 웃기지 않는 개그 실력으로 사회하는 수준까지 갔겠냐고."

보다보니 오바이트가 쏠려서 후딱 채널을 돌렸더니 추석 특집 스타 골든벨이다. 개그맨들 대거 앉혀 놓고 사회자 지석진은 얼마나 잘났길래, 개그맨들 얼굴 품평으로 웃기려 든다. 그래서 누가 더 못생겼나 시합하고 있다. 하라는 퀴즈는 안하고 프로그램 시작하고 나서 얼추 10분 이상 서로의 외모들을 가지고 오락가락이다. 오지헌이 스스로 못생겼다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하니, 뒤에 있던 여자 연예인이 한마디 한다. "나도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참 놀고 계시네요." 그 멘트로 웃기려 했다면 당신이야말로 놀고 계셨다.

이쁜이들한테 상투적인 상찬을 퍼붓는 것만이 외모 지상주의가 아니다.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놀리는 것도 거꾸로 외모지상주의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악질 중의 악질이다. 공중파 TV는 버젓이 이런 짓을 저지른다. 휘영청 한가위 달 보며 엉뚱한 소원 빈다. 조상님이여, 악질 프로그램의 공해를 해결해주시압.

연휴 방송에서 가장 불쌍한 이들은 아나운서들이다. 어나운싱(알리기)하려고 취직했다가 쇼를 강요당하니 그들은 명절만 되면 쇼걸이 된다. 추석날 오후에 그들은 저마다 섹시한 자태를 뽐내며 개그맨 가수들하고 짝짓기 놀이 하고 있다. 학창 시절에 경향적으로 좋은 대학 다니며 아나운서 되려고 공부 깨나 하셨을텐데, 처연하고 측은하다. 피디님들의 눈에 그들의 학력은 하등 중요할 이유 없나 보다. 이 대목에선 얼마나 귀엽고 예쁘게 보이느냐만 중요한가 보다.

그렇다고 연휴 방송이 마냥 후진 건 아니다. 가끔 기특한 게 있으니 그건 평소와 달리 셧더마우스하시고 세곡씩 연달아 음악만 트는 라디오의 BGM 특집 방송이다. 차라리 일년 내내 이런 특집만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또 결심한다. 다음 명절 연휴엔 결코 TV를 켜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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