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영화의 이면: 참신성과 내핍

영화 이야기 2010. 9. 16. 11:32 Posted by cinemAgora

추석은 극장가로서는 연중 최대의 대목이다. 연초의 설 연휴와 더불어 전통적으로 자국영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는 시기인 만큼 한국영화로서도 호재가 아닐 수 없다. 올해는 특히 추석 연휴가 주중에 걸쳐 있어 어느 때보다 긴 명절 연휴가 됐다는 점이 한국영화들끼리 더 혹독한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해결사>와 <시라노 연애조작단> <무적자>와 <퀴즈왕> 그리고 <그랑프리>까지, 모두 다섯 편의 상업영화가 이 기간의 박스오피스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이런 시즌적 특수성 때문에, 추석 시즌은 한국영화의 기획 역량과 투자 심리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알다시피, 최근까지 한국영화계엔 스릴러 열풍이 불었다. 청춘 스타 원빈을 앞세우고 500만 명 이상의 관객 동원에 성공한 <아저씨>는 그 정점에 서 있던 작품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추석 시즌에 뚜껑을 열어 보인 영화들은,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엿보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스릴러 붐’이 한 풀 꺾인 대신, 코미디와 같은 한국의 전통 강세 장르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또 하나, 2008년 이후 지속된 한국영화의 침체 국면을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돌파하려는 기획이 도드라진다는 점이다. 그 기획의 단면을 부연하자면, 참신성과 내핍이다.

<시라노: 연애 조작단>은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 등의 독특한 휴먼 코미디를 선보여온 김현석 감독이 메가폰을 쥔 로맨틱 코미디다. 몇 년 전만해도 로맨틱 코미디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 때가 있었지만(그리고 대부분의 영화들이 흥행에 참패했다), 최근엔 가뭄에 콩나듯 나왔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오히려 신선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라서 투자 받기가 힘들었다”고 털어 놓았다. 2008년 <추격자>의 대성공 이후 최근까지 스릴러 아니면 투자 받기가 어렵다는 게 영화계 안팎의 정설이었으니 그 사정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모험보다 안전을 추구한다.)
 
그러나 많은 관객들이 꼬리를 무는 비슷한 설정의 스릴러 릴레이에 식상해질 무렵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어냄으로써, 보기 좋게 허를 찌른 셈이다. 게다가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의 절반 수준(22억 원)으로 제작된 만큼, 손익분기점에 대한 부담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처럼 참신성과 내핍이라는 양날의 칼로 돌파구를 마련한 사례 가운데는 장진 감독의 <퀴즈왕>도 있다. 순제작비 3억 3천 만 원. 거의 독립영화 수준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연극연출가 출신의 장진의 재기와 그를 신뢰하는 많은 배우들의 기꺼운 열연을 승부수로 내건 작품이다. 볼거리보다 코미디라는 장르적 쾌감 그 자체에 천착한 이 영화는 추석 대목에는 대작이 성공한다는 불문율에 정면 도전을 시도한 셈이다.

역시 추석 시즌에 맞춰 16일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는 그보다 훨씬 적은 2천 만원에 제작돼 또 다른 화제를 모았다. 대학 영화과 졸업 작품의 제작비 수준으로 신작을 선보인 홍상수 감독의 시도는, 돈이 없고 투자가 안된다고 해서 창작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입증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최근의 한국영화계는 본능적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투자 사이드의 관성과 새로움으로 무장해 관객들을 발굴해내려는 창작 사이드의 열정이, 충돌하거나 타협하는 드라마틱한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앞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흥행 성적을 낸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같은 경우엔 그 관성과 열정이 기이하게 조우한, 불우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트렌드를 좇는 것은 돈이지 창의력이 아니다. 돈의 논리에 굴복해 뒤를 좇는 기획이 쇠퇴하는 자리에 새로운 트렌드를 개척하려는 열정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한국영화 투자수익률이
-40%에 달했던 2007년의 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지만, 어떻게든 관객들을 만나고자 하는 창작자들은 참신성과 내핍을 내세운 기획으로 스스로 돌파구를 마련해 전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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