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에 전화 벨이 울려 휴대폰을 꺼냈더니 부산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섹션을 담당하고 있는 이상용 프로그래머다. 이미 영화제 측으로부터 의뢰 받은 모든 무대 인사 일정을 다 소화한 뒤여서, ‘이거 또 뭐 급한 부탁이 있나 보군짐작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였다. 당일 저녁에 예정된 관객과의 대화(GV) 행사의 대타 진행을 의뢰하기 위한 전화였다. “원래 진행을 맡기로 했던 분이 갑자기 몸살이 걸렸어요나는 물었다. “어떤 영화인가요?” “미드나잇 패션 부문에 초대된 박수영 감독의 <죽이러 갑니다>라는 한국영화입니다. 슬래셔 무비에요.”

허걱. 슬래셔라면 사지 절단에 피가 솟구치는, 그런 영화라고? 가뜩이나 이런 종류의 영화에 취향이 없던 터라 슬쩍 뺐더니 “B급 영화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고 덧붙인다. 영화제 덕분에 숙소까지 얻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뭐해서 마지 못해 수락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좋아, 영화제에 왔으니 평소 잘 안보는 장르에도 한번 도전해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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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초장부터 팔 다리 절단 신이 나온다. 해고 노동자 김씨(이경영)가 기업주인 엄사장 가족들의 별장 여행길을 급습, 그와 가족들을 신체를 하나 둘 훼손한다. 톱으로 슬근슬근. 사장은 팔을 자르고, 아들은 다리를 작살내고, 아내는 귀를 자르고, 딸은, 나는 질끈 눈을 감는다. 그냥 공포영화이겠거니 이 영화를 찾은 관객들이 흘리는 신음 소리가 들린다. “미치겠다.” 끄응..나도 미치겠다.

그런데, 이 영화 조금 지나니 희한해진다. 참혹한 신체 훼손의 전경을 나열해 보이더니, 난데 없이 소등극으로 선회한다. 그러니까 해고 노동자 김씨가 이들을 별장 안에 가둔 뒤, 영화는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가족 내 권력 관계가 어떤 해프닝을 만들어내는지를 조소한다.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 치는 와중에, 이 가족에 얹혀 사는 사장의 처남 오피디(김진수)가 등 떠밀려 별장 밖으로 내달린다. 또 걸린다. 가족들의 반격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김씨가 다음 수순으로 넘어갈 찰라! 예상치 못한 반전이 도래한다.

반전 이후로는 사실상 코미디다. 조금 전까지 미치겠다를 연발하던 관객들이 폭소를 내지른다. 박수영 감독 역시 블랙코미디적인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듯, <죽이러 갑니다>는 슬래셔를 표방하는 척, 슬쩍 풍자극으로 돌변한다. “열심히 하라는 말을 습관처럼 되뇌이는 엄사장은, “열심히 한 자가 돈을 번다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김씨는 그를 향해 말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다. 일견 전형적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립은 현대판 마리 앙투아네트를 향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를 하위 장르적인 화법으로 풀어 헤치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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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더 나아가 계급의 문제를 풍자의 도마 위에 올리는 박수영 감독은, 철저하게 경제력에 의해 서열화되는 가족 내 권력학을 비추는 중반부를 넘어, 쫓고 쫓기는 추격신의 경쾌한 난장으로 이끄는 후반부에 이르러선 우리 사회의 가족 이기주의와 그 부산물인 표적 없는 적대감을 건드린다. 어떤 대상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싫고 그래서 배제시키고 싶어하는 것. 사회적 맥락이 아닌, 상황 논리 속에 갇혀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는 습성.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감독은 이런 상황을 시끌벅적 소동 코미디로 그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파업 진압하는 경찰들의 모습에서 그런 걸 느꼈습니다. 저한테는 그게 코미디 같아 보였습니다.”

영화가 시작될 때 나오는 투자: 배우 및 스탭들이라는 크레딧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그리 넉넉지 못한 예산으로 제작됐다. 개그맨 출신 배우로 이 영화에 출연한 김진수는 우리 영화는 밥차 같은 건 꿈도 못꿨다면서 이승표 프로듀서가 촬영장에서 김밥을 나줘주면서 기껏 한다는 얘기가 김밥 한 사람당 한줄 씩입니다였다며 배고팠던 촬영 과정을 술회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배고픈 상황을 뚫고 나가는 힘이, 저예산 영화 특유의 번뜩이는 재치와 돈 없어서 이렇게 찍었어, 그러니 이해해줘하며 시침 뚝 떼는 치기라면, <죽이러 갑니다>는 바로 그런 정신으로 중무장한 채 제작 환경의 열악함을 장점과 매력으로 승화시킨 사례다. 누군가는 그것을 B급 정신이라고 부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똘끼 충만이라고 부르고 싶다. 등 떠밀려 상영관에 들어갔다가 오랜만에 똘끼 제대로 충만한 영화를 만나니, 슬쩍 지겨움이 몰려오던 영화제 막바지가 한결 유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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