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로 여겨질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신 분들만 읽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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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재난영화에는 일종의 공식이 있다. 공식이란 게 별 건 아니다. 최대한 간단하게 말해 재난이 주요 인물들의 관계를 바꿔 놓는다는 점이다. 갈등이 첨예했던 관계(소원했던 가족이나 연인 관계일 경우가 많다)라면 재난을 함께 극복하며 갈등이 극적으로 해소된다. 당연히 생과 사도 엇갈린다. 재난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자신의 탐욕을 밀어 붙인 이라면 재난 과정에서 어김 없이 죽는다. 물론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은 살아 남지만, 이들 가운데 누군가의 숭고한 희생을 대가로 한다.

국 최초의 재난 영화를 표방하고 나선 <해운대>는 어떤가. 엄밀히 말해 이런 재난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파편적으로 이어지는 세 커플의 사연을 다소 장황한 코믹 휴먼 드라마의 호흡으로 담아내는 와중에 영화 말미에 이르러 메가 쓰나미의 기습으로 점프한다. 쓰나미는 이들의 생과 사를 결정짓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관계와 삶을 바꿔 놓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쓰나미

이혼
한 지진학자 김휘(박중훈)와 그의 전 부인 이유진(엄정화)은 딸을 살려 놓고는 호텔 옥상까지 덮친 두번째 쓰나미로 장열한 죽음을 맞고, 젊은 구급대원 형식(이민기)도 여자 때문에 자신을 적대시하던 럭셔리남을 구해 놓고 희생한다. 해운대에서 회식당을 운영하는 연희(하지원)는 흠모하던 만식(설경구)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돼 있음을 알고 괴로워하다 쓰나미를 맞는다. 둘은 혼비백산, 죽음의 위기를 같이 넘는다.

수십만 명은 족히 죽었을 법한 쓰나미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만식과 연희는, 굳이 쓰나미가 안왔어도 했을 백년가약을 맺기로 하고 다시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능글맞은 한량 오동춘(김인권)이 얼떨결에 10명의 목숨을 살렸다며 용감한 시민상을 받지만 어머니의 죽음 앞에 오열할 뿐 개과천선한 증거는 없다.

영화는 몇몇 죽음의 순간을 통해 관객들의 눈물을 쏙 빼는 걸로 만족하고 황급히 본연의 자리로 돌아온다. 재난은 너무 늦게 찾아왔고, 한바탕 휘몰아치고 나니 영화를 끝낼 시간인 것이다. 재난이 끝난 이후의 풍경은 살아 남은 자들이 지어 보이는 속성의 슬픔과 밝고 유쾌한 일상으로의 신속한 복귀다.
사실 몇 명의 주요 인물이 죽었을 뿐, 그리고 만식의 어머니가 연희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 정도를 제외하곤 쓰나미가 이들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꾼 건 별로 없다. 만식의 어머니와 연희가 화해하는 것조차 쓰나미와의 관련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재난은 이들의 지지고 볶는 일상에 살짝 틈입한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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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균 감독은 영화 홍보 과정에서 여러 인터뷰를 통해 <해운대>가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 한국적 재난영화가 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니까 재난이 주인공이 아닌 사람이 주인공이 재난영화라는 얘기였다(내가 알기론 모든 재난영화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이것을 제작비의 압박을 우회해야 했던 사정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쨌든 그가 추구한 한국적 재난영화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감동의 순간을 향해 점프!

어쨌든 좋다. 자칭 한국적 재난영화 <해운대>는 과연 재난이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주인공도 아니라는 게 문제다. 결정적인 순간의 감동을 준비하는 지나치게 많은 캐릭터들의 산발적 행위가 나열될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들은 관객들에게 이어질 재난 과정에서 누가 누구와 최후의 운명과 절규의 순간을 함께 할지만을 지시한다. 재난은 드라마에 개입되지 못하고 드라마는 재난 속에 녹아들지 않는다.

바다에서 생을 일궈온 만식은 이상하게도 그의 눈앞에 목격된 재난의 징조를 눈치채지 못한 채 연회의와의 러브 라인을 쌓아 올리느라 필사적이다. 지진 해일이 불어 닥친 바다 위에 과연 구조 헬기가 뜰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형식은 위기에 처한 연인과 관객들 앞에서 숭고한 죽음의 순간을 선사하기 위해 날아가 몸을 던진다. 쓰나미라는 주요 플롯의 위기감을 촉발시켜야 할 김휘는 시종일관 연구실에서만 고함을 질러대다 신속히 아빠로서의 방기된 임무를 완수한 뒤 아내와 급화해를 이루고 죽는다. 홀로 엘리베이터에 갖혀 익사 직전까지 간 유진도 남편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라는 각본의 지시를 지키기 위해 다소 어이없게 구출된다. 또 한번 황당하게도, 악역에 가까운 두 인물, 그러니까 오동춘은 산 영웅이, 억조(송재호)는 죽은 영웅으로 급조된다.

감독의 말대로, 이런 모든 설정이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공식에서 비껴나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익숙한 관습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신선한 건 아니다. 익숙한 할리우드 재난영화보다 이 영화가 오히려 더 익숙해 보이는 이유는, 극장문을 나서는 순간 증발되고 말 신파적 눈물 서비스에 매진하느라 재난을 핑계로 사용한 흔적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니면 할리우드에서 구매해온 40억 짜리 CG 쓰나미가 아까워 사람을 핑계로 썼거나. 그걸 '한국적'이라고 부르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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