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경찰서에 출입하는 1진 선배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고 달려간 시각은 자정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한 호텔 근처 뒷골목에서 나를 본 선배는 주춤주춤 가방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내 양복 언저리에 몇 방울의 소주를 흘린다. 영문을 모른 내가 물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선배는 짧게 대답했다. “취객인 척 해야 해. 술 냄새가 나야지.” 순간, 나는 잠입 취재에 투입될 예정이라는 걸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작은 서류 가방 하나를 나에게 들려 줬다. “카메라는 미리 켜뒀다.” 이른바 몰카였다.

그날의 작전은 불법 영업 중인 증기탕 실태 취재였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안마시술소를 가장하고 실제로는 매춘 영업을 하고 있는 한 업소의 내부를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 게 내 임무였다. “그러면 들어가서 매춘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적잖이 당황한 나에게 선배는 작전의 정황을 전해줬다. 그러니까 내가 손님을 가장해 들어가 적당히 촬영을 했을 무렵, 경찰이 기습 단속에 나선다는 얘기. 이미 경찰들과 다 말을 맞춰 놨으니 안심하라는 당부였다.

여하튼 콩닥대는 가슴을 안고, 나는 취객을 가장해 증기탕 내부 객실까지 안내를 받는 데 성공했다. 그리곤 나를 방까지 안내한 이와 잔뜩 혀 꼬부라진 소리로 흥정을 하는 연기까지 펼쳐야 했다. 사실 취재비도 안받아온 마당에 괜히 내 돈 쓰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유 오빠 짜게 굴기는. 곧 아가씨 들어갈 테니까 보고 계산하시든가.” 프론트 아가씨는 문을 쾅 닫고 나간다. 그 사이, 나는 서류 가방을 들어 방의 구석 구석을 촬영했다. 그리곤 적막.

5분여가 흘렀을까. 갑자기 쾅쾅 소리가 나더니 객실이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그리곤 문이 활짝 열리며 아까 나와 흥정을 하던 아가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오빠 단속이야, 튀어!’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물론 카메라는 계속 상황을 담고 있었다. 좁은 복도로 벌거벗은 아저씨들이 수건만 걸친 채 튀어 나오고 그 사이로 짧은 치마 차림의 아가씨들이 뒤엉켜 비명을 지르며 뛴다. “어디로 가란 말야?” 누군가 소리쳤고, “따라오세요.”라는 남자의 말이 들렸다.

지하다.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서 퀘퀘한 냄새에 보일러 소음이 웅웅대는 좁은 통로를 수십명의 반라 남녀들이 뛴다. 나는 살짝 속도를 늦춘다. 그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빨려 들어간다. 나도 얼떨결에 그 속에 갇힌다.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힌다. 그리곤 누군가 한다. 침묵그리고 정적.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문쪽에 버티고 선 건장한 체구의 남자 두 명이 자기들끼리 속닥이는 소리가 소린다. “어떤 새끼가 꼰질렀는지 잡히면 뼈도 못추릴게 할거야.” 그 순간, 소리가 들린다. 서류 가방 속의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가. 촤르르르르. 나는 생각한다. ‘, 여기서 저승길로 가는 건가? 이왕이면 알카에다나 하마스한테 잡히는 게 낫지, 하필 증기탕 보일러실이라니 이게 무슨 기구한 기자 팔자인가

혹시라도 들킬새라 나는 서류 가방을 품에 꼭 껴안으며 어떻게 하면 카메라의 작동을 멈출 수 있을까,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긴장 속의 고요. 카메라는 눈치 없이 계속 돈다. 촤르르르르. 또 다른 남자의 말이 이어진다. "누군지 잡으면 아작을 내버려야지!" 침이 한번 더 꼴깍 넘어간다.

그 순간, 철문 쪽에서 쿵쾅 소리가 난다. 그리곤 둔탁하고도 짧은 육박전. 눈 깜짝할 사이에 문쪽에 서 있던 남자들이 제압당한다. 경찰이다! 아, 아니 구세주다! 구세주 한 분께서 철문 안을 힐끗 보더니, 소리친다. “다들 거기 꼼짝 말고 계세요.”

이제야 해방의 서광을 맞이한 내가 가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반라 남녀들의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철문 밖으로 나가자 경찰이 대뜸 멱살을 쥔다. “당신 뭐야?” 나는 모기 소리처럼 대답한다. “기기기기자예요.” 단속 경찰들 뒤로 선배가 보인다. 쟤 우리 기자 맞아요. 취재 중이었어요.”

구사일생이라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내 평생 가장 길고도 긴장된 10분여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는 번개를 일곱 번이나 맞은 한 노인이 틈만 나면 번개 맞은 일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그렇게, 우리의 기억 속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다름 아닌 강렬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 역시 운 나쁘게 치매에 걸린다면, 말년에 주저리주저리 회상할 순간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앞서 네 개의 에피소드를 '조금' 미리 소개해 봤습니다.^^이상 추억 콩트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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