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처럼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기는커녕, 일을 위해 뉴스 중계차 앞에 서 있던 나는, 스탭들이 명동성당 입구 쪽에 중계차 포인트를 잡고 설치를 서두르는 사이, 미리 써온 상투적인 중계 멘트를 머리 속에 꾸역꾸역 입력시키고 있었다.
귀에 찬 리시버로 뉴스 시작을 알리는 타이틀곡이 들린다. 곧바로 부조종실의 피디콜이 날아든다. “최광희씨 스탠바이~!” 나는 미리 중계 카메라맨이 지정한 자리에 서서 마이크를 들고 카메라를 바라 봤다. 온에어까지 남은 시간은 1분여. 귓전으로 앞선 뉴스 꼭지의 방송 소리가 들린다.
심호흡을 하고 내 뒤에 비쳐질 인파들을 슬쩍 바라 본 뒤, 카메라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 카메라맨 바로 옆에 서 있는 한 여인. 집시 풍의 옷차림에 상당히 아방가르드한 헤어 스타일을 한 젊은 여인이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뉴스 중계를 구경하러 온 시민이려니 싶었는데, 아무래도 시선이 껄쩍지근하다.
아무려나, “명동에 나가 있는 중계차 연결합니다”라는 앵커멘트가 들리자 카메라를 응시했다. “최광희 기자?” “네, 명동에 나와 있습니다.” “그곳 분위기 전해주시죠.” “네, 성탄 전야를 맞은 이곳 명동 거리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시민들로 북적대고 있습....” 그 순간, 뭔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내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멘트를 하다 말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까 내게 괴이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 여인이 내 뒤로 슬쩍 다가와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흐흐흐”하는 웃음까지 흘리면서.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이었지만, 생중계 상황에서 멘트를 중단할 수는 없는 일.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며 준비된 멘트를 읊어 나갔다. “시민들은…응…20세기 마지막….성탄절이 아쉽다는 듯…킁…삼삼오오…아…그렇게…오늘 저녁을…즐기고….있습니….다아..으헉”
이쯤되면 카메라맨이 빨리 카메라를 다른 쪽으로 돌려줘야 하는데, 눈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의 카메라는 고정된 상태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나는 스스로 프레이밍아웃(카메라의 시야 밖으로 피사체가 나가는 것)을 감행함으로써 이 위기 상황을 모면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카메라의 시야 밖으로 나가자, 더 이상 그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중계를 마친 뒤 주위를 둘러보니 그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방금 누구였어요?” 카메라맨도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몰라, 하도 갑자기 나타나서 나도 어떡해야 할지 몰랐어.”
아, 그 황당하고도 민망한 손길이 안겨준 모멸감을 겨우 추스린 나는, 한 시간 뒤 다시 같은 장소에서 생중계 연결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에 또!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역시 같은 위치에서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재밌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번에는 카메라맨이 먼저 알아차리고 소리를 지른다. “절루 안가?!” 여인은 미동도 않고 “흐흐흐” 웃는다.
나도 예방 차원에서 지레 손사래를 치며 경고했다. “또 그러면 가만 안있어요!” 스탠바이 신호가 들리고 정색을 하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가 위치 이동을 시작했다! 나는 중계 포인트에서 다리를 번쩍 들어 그녀쪽으로 힘껏 발길질을 했다. “다가오지 말라니까!” 아랑곳없다. “흐흐흐” 웃으며 내 뒤쪽으로 슬금 슬금 걸어오는 그녀!
카메라에 불이 켜진다. 야속한 앵커가 나를 부른다. “최광희 기자!” “네 명동에 나와 있습니…헉” 또다! 이번에는 더 깊고 힘차다! 카메라가 얼른 거리 쪽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멘트는 해야 하는 상황. 나는 찰거머리처럼 내 등뒤에 바짝 붙어 있는 그녀를 쫓기 위해 필사적으로 뒷발질을 해댄다. 그리고 입으로는 평화와 축복, 사랑이 넘치는 성탄 이브의 분위기를, 처절하게 전한다.
하나도 평화롭지 않았던 나의 20세기 마지막 성탄 이브는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기습 성희롱의 밤으로 얼룩졌다. 물론, 끝내 나를 두번이나 욕보이고 표표히 사라진 그녀에게는 축복의 밤이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