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취재중 찾아온 얍삽한 행운

별별 이야기 2009. 7. 16. 21:04 Posted by cinemAgora
영화 리뷰 않고 딴짓하기, 지난 번 태국 영화제 취재 관련 일화에 이어 2탄이다. 이번에는 필자가 방송국 사회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의 웃지 못할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시각은 약속된 오전 11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프레스 센터가 긴장에 휩싸였다. 총선 시민 연대가 다가올 2000년 총선에서 낙선 운동 대상으로 거명할 후보자들을 발표하기 직전이었다. 당시 시민 단체의 낙선 운동은 언론을 달구는 톱 뉴스로 떠올랐다. 철새, 부패 정치인들의 낡은 행보에 넌더리가 난 유권자들로서는 낙선 리스트에 과연 어떤 인물이 오를지 관심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할당된 장소는 프레스 센터 입구쪽. 선배 기자 두 명이 프레스 센터 안에 설치된 중계석에 앉고, 나는 그들에게 최대한 빨리 낙선 리스트를 입수해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관계자들이 행사장 안에서 발표 준비를 하고 있는 순간, 행사장 입구 쪽에는 시민 단체 간사들이 기자들을 위해 따로 준비한 낙선 리스트 책자를 배포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 빽빽하게 운집한 기자들이 서로 먼저 리스트를 받겠노라고 줄을 섰다. 마치 전시 식량 배급을 기다리는 배고픈 민간인들처럼, 기자들의 표정은 초조하고 처절했다.

나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 줄의 맨 앞에서 두번 째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한 석간 신문의 기자가 거의 울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애원 또는 읍소를 하고 있었다. “제발요! 우린 석간이라 마감이 11시예요. 지금 좀 먼저 주세요.” 시민 단체 간사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발표가 시작되는 11시까지는 절대 드릴 수 없습니다.” 기자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11시가 마감인데, 11시 이후에 주겠다는 게 말이 돼요?” 간사는 여전히 차갑다. “안됩니다!” 그 순간, 단말마의 절규를 쏟아낸 석간 기자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행동을 감행했다. 시민 단체 간사의 손에 들려 있던 배포물 꾸러미를 향해 몸을 날린 것이다. 간사 역시 온몸으로 꾸러미를 껴안으며 필사적으로 기자의 기습을 막아내려 애썼다. 벼랑 끝에 몰린 기자는 마침내 꾸러미 가운데 살짝 삐져 나와 있는 책자의 한 부분을 잡아 채는데 성공했다.

, 침을 꼴깍 삼키며 이 흥미롭고도 스펙터클한 액션신을 감상하고 있었다. 간사는 방금 잡은 책자를 끄집어 내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는 기자의 손을 사정 없이 뿌리쳤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찰나적인 딜레마에 빠졌다. 책자가 반쯤 삐쳐 나와 누군가 슬쩍 당기기만 해도 빠져나올 것 같은 상황. 게다가 기자와 간사가 공격과 방어에 힘쓰느라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직선 거리로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그 책자 사이의 공간은 무주공산이었던 것이다!

능이 먼저 행동했다. 나는 앞에서 씨름하고 있는 기자의 어깨 너머로 과감하게 손을 뻗어 책자를 움켜 쥐고 쑥 뽑아냈다. 그리곤 전광석화와도 같은 동작으로 뒤로 돌앗! 순간 뒷덜미에 간사의 손아귀가 느껴졌다. 익숙한 육두문자가 귓전을 올렸다. “어딜 가, dog baby!” 나는 온몸을 전율시키며 손아귀를 뿌리쳤다. 그리곤 응수했다. “뉴스 하러 간다, 이 에이틴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즈음에서 BGM이 필요하다! 아래 음악을 살짝 틀어주고 마저 읽는 센스!)



<불의 전차>라는 영화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선수를 보았는가? 그 아름답고도 처연한 슬로 모션을? 그 순간, 프레스 센터의 중계석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는 내 스스로가, 이상하게도 <불의 전차>에서 슬로 모션으로 역주하고 있는 달리기 선수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입구를 통과하고, 중계석을 향해 달려갈 때, 벌써 생방송에 들어가 있는 두 선배 가운데 한 명이 힐끔 뒤를 돌아다 보고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나는 팔을 쭉 뻗어 책자를 입수했음을 알렸다. 선배는 흥분과 감격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마치 높이 뛰기 선수처럼 몸을 뒤로 있는 힘껏 제치며 손을 뻗었다. , 바통을 넘겨야지!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책자를 선배의 손에 던졌다. 시각은 11시 정각을 알리고 있었다. 발표가 시작되려는 찰나, 낙선 리스트는 먼저 전파를 타고 있었다.

살다보면 가끔 이렇게 얍삽한 행운이 찾아온다. 순간에는 짜릿할지 모르나 끝내 뒷맛이 개운치 않은 그런 행운. 생중계를 마치고 회사에 들어가니 데스크가 우리들을 향해 기립 박수를 보내며 소리쳤다. “우리가 적들보다 10초나 빨랐다고, 10초나!”

나는 뒤늦게 물었다. “그래서, 낙선 리스트에 누가 올랐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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