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앞에서!

별별 이야기 2009. 7. 14. 15:22 Posted by cinemAgora

태국 왕실


늘상 영화 리뷰만 쓰는 게 좀 따분하다 싶어 오늘은 개인적으로 재미난 추억거리 하나를 공유해볼까 한다. 2003년 태국에서 열린 제 1회 방콕 국제영화제에 취재 갔을 때 일이다. 당시 한국에서 이 영화제에 세 명의 기자들이 초청됐는데, 우리는 영화제측으로부터 항공편과 숙박까지 제공받은 덕에 영화제의 공식 행사에는 죄다 참석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영화제가 무르익을 무렵, 태국 왕실이 마련한 만찬 일정이 잡혔다. 주최측은 왕족이 참여하는 행사인만큼 최대한 예를 갖추길 요구했다. 그 예란, 턱시도를 갖춰 입으라는 얘기. 당연히, 우리는 턱시도가 없어 난감했다. 안내인은 왜 턱시도도 챙겨 오지 않았냐고 핀잔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평생 그런 옷을 입을 이유가 없었던 우리가 태국까지 와서 턱시도를 입을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냔 말이다. 주최측은 빌리는데만 한 벌에 100달러씩 하는 턱시도를 구해 예의 모르는 한국 기자들에게 입히고야 말았으니, 문제는 죄다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는 것. 엉거주춤한 턱시도 차림의 우리는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한참 낄낄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만찬이 시작됐다. 라운드 테이블만 족히 수 백 개는 됨직한 엄청나게 큰 호텔 연회장. 과연 남자들은 죄다 턱시도 차림이고 여자들은 모두 이브닝 드레스를 입었다. 억지로라도 턱시도를 구해 입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무렵, 장중한 음악이 흐르더니 갑자기 홀 안에 있던 1천여 명의 게스트들이 일동 기립한다. 깜짝 놀라 얼떨결에 일어났더니, 저쪽에서 누군가 납신다. 통역에게 슬쩍 물었더니 공주님이시란다. 그리고는 내 눈에는 꽤 신기한 풍경이 펼쳐졌는데, 공주님의 행진에 맞춰 양쪽에 도열해 있는 게스트들이 도미노처럼 깊숙이 인사를 올리는 것이다! 아, 이건...시대극에서나 봤음직한, 그런 상황! 약간 뻘쭘해지는 기분을 추스리고 나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는 속담을 떠올렸다. 이심전심일까. 우리 일행은 앞을 지나는 공주를 향해 깎듯이 90도 각도의 예를 갖췄다.

곧이어 만찬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일성. 밥이 나오려나 보다, 싶었는데 음식은 안나오고 태국 전통 악사들이 나와 연주를 시작한다. 뭐라 뭐라 노래를 부르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 어쨌든 악사의 연주와 노래가 끝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게 또 풍경이다. 주방에서부터 수 백 명의 서번트들이 접시를 들고 행진한다. 한 사람이 한 손님에게만 접시를 나르는 것이다!

접시 하나를 비우고 나면 악사의 연주와 노래가 다시 시작된다. 무슨 소리냐 통역에게 물었다. "앞으로 나올 음식을 소개하는 노랩니다." 아, 그러니까 방금 나온 이 음식을 보아하니 앞선 노래의 가사는 대충 이랬던 것이다. "살짝 데친 댓잎 위에 삶은 콩과 밥을 얹었습니다아으아~! 숯불에 구운 감자를 함께 올렸답니다아으아~!"

밥을 이렇게 재밌게 먹어보긴 처음이다. 여하튼 네번째 접시가 날아들 무렵, 고개를 들어 공주님이 앉아 계신 테이블을 슬쩍 봤더니, 접시를 나르는 데 순서가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가장 먼저 공주님께 가져다 드리고, 공주님이 오케이 사인을 내리면 그제서야 손님들에게 나르는 것이었다. 역시 왕실의 위엄이 대단하구나, 느낄 무렵, 공주님 테이블 맨 오른쪽에 앉아 있던 장관 한 명이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끓는다. 그리곤 무릎으로 공주님께 다가가 속닥속닥 귓속말을 하는 것이다. 아, <왕과 나>! 머리 높이가 공주 보다 높아선 안된다!  

어쨌든 우리는, 말로만 듣던 왕실의 지엄하심을 생애 처음으로 직접 목격하고 약간 쫄아 있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있던 기자 한 명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화장실에 갔나? 두리번 거렸더니, 세상에! 그가 디카를 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공주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약 2미터 앞까지 접근한 그는 카메라를 들어 공주를 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공주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주변 사람들, 모두 황당하고 뜨악하다는 표정. 그러나 그가 외국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는 않았고, 공주도 태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나는, 턱시도도 못챙겨온 주제에 무엄함까지 저지른 한국 기자들에게 또 한번 안내인의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으나, 다행이 그는 그 장면을 목격한 것 같지는 않았다. 왕실의 근엄함을 가볍게 뛰어 넘으며 취재 열정을 불태운, 그 기자. 지금도 모 영화 전문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
BLOG main image
3 M 興 業 (흥 UP)
영화, 음악, 방송 등 대중 문화의 틀로 세상 보기, 무해한 편견과 유익한 욕망의 해방구
by cinemAgora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187)
찌질스(zzizzls) (3)
영화 이야기 (702)
음악 이야기 (34)
TV 이야기 (29)
별별 이야기 (122)
사람 이야기 (13)
3M 푸로덕숀 (156)
애경's 3M+1W (52)
민섭's 3M+α (27)
늙은소's 다락방 (26)
라디오걸's 통신소 (1)
진영's 연예백과사전 (4)
순탁's 뮤직라이프 (10)
수빈's 감성홀 (8)

달력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NM Media textcube get rss DNS Powered by DNSEver.com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3 M 興 業 (흥 UP)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cinemAgora [ http://www.ringblog.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티엔엠미디어 DesignMyself!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