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대한문 앞에 갔다. 영어로 Demonstration, 한국어로 '시위'를 하기 위해서다. 나는 이 정부의 '막가파'적 정책이 부른 비극에 분노를 표현하고, 미필적 고의로 이 비극을 조장한 책임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와 정책 쇄신을 촉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간 나는, '말 그대로'의 시위를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슬픔을 채 가누지 못한 시민들이 삼삼 오오 모여 있었고, 그 사이 여고생들이 MB 탄핵 서명 운동을 받고 있거나 대학생들의 깃발이 나부낄 뿐, 해는 뉘엇뉘엇 져 가는데 견고한 차벽에 가로 막힌 시민들은 그저 앉거나 서 있을 뿐이었다. 이렇다할 구호도 없다. 간헐적으로 몇몇 시민들이 "이명박은 물러가라" 외치긴 했지만, 군중을 선도할 지도부도 없었고, 따라서 전통적인 시위에서 볼 수 있는 '아지테이션'도 없었다. 지난해 촛불 집회 때도 느꼈던 그 자유분방함이긴 했지만, 이것을 과연 조직화된 시위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하물며 촛불을 켜면 진압의 빌미가 되니 촛불을 끄라고 자발적으로 말씀하시는 시민까지 계시니, 나는 경찰의 근거 없는 겁박이 학습효과로 이어지는 풍경에 한편으로 황망하기까지 했다.

차벽 너머로 경찰의 경고 방송이 들리기 시작한다. "시위대 여러분, 경찰차를 손괴하는 행위는 명백한 범죄 행위입니다." 실제로 일군의 청년들이 경찰차의 유리창을 각목으로 두드리거나 물을 뿌리고 있었고, 차벽 뒤에 선 경찰들은 카메라로 그들을 열심히 체증하고 있었다. "경찰차를 손괴하는 행위는 반드시 처벌될 것입니다." 요컨대 명색이 법의 수호자인 경찰로서 범법 행위를 눈앞에서 지켜볼 수 없다는 얘기다. 여기까진 뭐 좋다. 나는 차벽이라는 국가 폭력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을 지금 단계에서 폭력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에도 흔쾌히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데 그 다음 말부터가 가관이다. "곧 경찰이 작전에 돌입합니다. 작전이 시작되면 취재 기자 여러분과 선량한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작전 지역은 고도로 위험한 곳입니다. 다른 곳으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경찰은 작전 도중 일어난 불상사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곤 "시위대 여러분 해산하십시오. 작전이 시작되면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뒤따랐다.

아, 경찰은 지금 시민을 협박하고 있는 것인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때리기라도 하겠다는 얘기일까?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동네 깡패들이 애들 '삥' 뜯을 때 써도 딱 어울릴만한, 버전은 다르되 요컨대, "분명히 말했다. 다쳐도 책임 안진다고!"라는 말, 이게 경찰이 시민한테 할 얘긴가.

어쨌든 나는 대한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내 자신이 선량한 시민이 아닌가, 자문했다. 맞다. 나는 선량한 시민이다. 도로교통법을 위반하지도 않았으며 바쁜 시간 쪼개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실천하기 위해 나온, 매우 선량할 뿐더러 참여적인 시민이다. 그럼에도 경찰은 헌법을 뛰어 넘는 초법적인 발언을 일삼으면서 나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잠재적 범법자, 선량하지 않은 불순분자로 모는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작전 지역에서 물러나라는 말처럼 모호한 경고도 없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작전 지역이고 그 작전의 대상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그냥 위험하니 해산하란다. 그러므로 그 방송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장소에 있었던 모든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갈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대한민국 시민인 나는, 국방의 의무도 충실히 수행하고 꼬박꼬박 세금까지 낸 나는, 내 나라 덕수궁 앞 대한문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권리조차 없다는 얘기인가? 이 나라의 정부를 성토할 권리조차 없다는 얘기인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서 있다간 다칠지도 모르고, 눈앞에 서 있는 수천, 수만의 경찰들은 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아, 그렇다면 우리 동네 파출소 경찰들은 또 어떻게 신뢰하란 말인가.

대한민국 경찰의 수준이 이 모양이다. 당신들은 헌법 공부부터 하고 나오라. 헌법도 알고 다 아는데 이 정부의 지침을 어길 수 없는 입장이라면, 법적 타당성과 근거를 갖는 경고 방송의 멘트라도 제대로 개발하고 나오라. 그리고 시위에 나선 시민도 명백히 선량한 시민이며 따라서 그들의 '집회 시위 결사의 자유' 뿐 아니라 안전까지도 '당연히' 보장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사실 역시 새기기 바란다. 만에 하나 선량한 시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 작전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맞다는 것도. 그래야 "무식한 말 하는 놈 상판때기나 좀 보자" 하는 시민들의 비웃음이라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세금 내기 억울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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