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연예인을 창녀로 만드는가

영화 이야기 2009. 3. 29. 00:27 Posted by cinem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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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란방> 2008, 첸 카이거


곧 국내 개봉을 앞둔 첸 카이거 감독의 <매란방> 초반부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남자로서 여자 역을 연기한 1930년대 인기 경극 배우 매란방이 한 세력가의 처소에 불려 간다. 매란방이 그의 거실에 들렀을 때 세력가는 이미 두 세 명의 미소년들을 희롱하고 있다. 매란방이 들어서자 세력가는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를 세력가에게 안내한 인물은, 매란방에게 이왕이면 그의 무릎에 앉으라고 지시한다. 매란방은 화를 내며 그곳을 빠져 나온다.

영화는 이 장면을 슬쩍 배치했지만, 앞서 그의 백부가 경극 배우가 얼마나 미천한 신분인지를 강조하며 왠만하면 그만두라고 충고하는 첫 장면과 연결되며 당대 경극 배우에 대한 세속의 시선을 짐작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매란방은 대중에겐 추앙과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권력가들에겐 희롱의 대상이었던 셈이니, 이른바 엔터테이너의 운명적 아이러니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근대 사회에서 '광대'라는 미천한 취급을 감수해야 했던 이들은, 자주 지배층의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됐다. 광대를 역시 남색 취향의 희생양으로 묘사했던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가 대표적이다. 예쁜 남자들이 이러했으니, 여성 예인들의 경우엔 오죽했겠는가. 익히 알다시피, 흔히 '기생'이라는 직업군으로 분류된 이들은 시서를 논하고 매란국죽을 그리는 양반의 고급 취향에 부응해야 함과 동시에 성욕의 배설구가 되는 데도 통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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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무지개> 1989, 김호선


현대 미디어 산업의 창궐은 연예인이라는 신흥 귀족을 탄생시키며 또  다른 꿈의 바벨탑을 축조했다. 대중의 욕망이 투영된 연예인들은 TV와 영화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다져 나갔고, 그들 중 극소수는 사실상 권력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권력을 쥐기까지 세력가의 은밀한 후원을 필요로 하는 비운의 메커니즘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의 한국영화에서 그러한 풍경을 가장 탁월하게 묘파한 작품은 바로 김호선 감독의 <서울 무지개>(1989)였다.

스타를 꿈꾸는 한 여성이 자신의 성공을 볼모로 한 정치 권력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는 과정을 담아낸 <서울 무지개>는, 당대 섹시 스타로 달돋음하고 있던 강리나의 광적인 연기에 힘입어 소름 끼칠 정도의 충격을 안겨줬다.(5공 정권 직후 개봉한 이 영화에서는 최고 권력자를 등장시키는 파격을 실험했다. 그 최고 권력자가 대머리였는지 여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정치 권력의 도덕성에 대한 대중의 의식/무의식적 불신이 은연중에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이 상세하게 재연해듯, 당대 연예인은 사회 전분야의 목줄을 쥐고 흔들었던 정치인들의 술자리를 빛내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였다. 수락하면 밥줄이 보장되지만 거절하면 밥줄이 끊기는 절박함 앞에서 절개를 지킬 수 있는 연예인이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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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 2004, 임상수


주목할만한 것은, 연예인의 성을 구매하는 권력이 90년대 이후 정치에서 자본으로 급속도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통과하며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담론에 포획된 과정과 맥을 같이 한다. 즉, 70-80년대 정치 권력에 주연을 빼앗겼던 기업과 자본이 주연으로 급부상하게 되면서, 그들은 감시의 눈이 많아져 몸조심 해야 하는 어르신을 대신해 광고주로서의 특권을 만끽하며 마음에 드는 연예인을 골라 노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됐다.(물론 그 전에도 그랬지만 눈치를 보셔야 했다.)

최근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장자연 리스트는 지난한 연예인 성 구매사를 또 한번 상기시키고 있지만, 동시에 의미심장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상징한다. 간단히 말해 새끼 권력, 어린 마초들이 아버지들의 추악한 역사를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연예인의 육체'라는 대중 사회의 상품을 배타적이고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쾌감을 누리는 주체가 신분적 세력가-->정치 권력-->자본 권력-->매니지먼트/미디어 권력으로 유전되면서 하향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끔찍하게도, 장자연 리스트는 나로 하여금 불온한 의문을 품게 한다. 대중과 매스미디어는 과연 무엇에 분노하는 걸까? 장자연의 절박한 처지에 진정으로 감정이입하고 있는 걸까? 혹시라도 연예인의 육체, 그 고귀한 상품을 독점한 세력에 대한 질투심을 드러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시대의
연예인을 창녀로 만들고 있는 건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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