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부 기자가 본 '과속 스캔들' 속 연예부 기자

민섭's 3M+α 2009. 2. 7. 14:5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정말이지 저속으로 영화 <과속스캔들>을 관람했다. 이미 700만 관객을 넘긴 뒤였으니 매우 뒤늦은 관람이었다. 기자시사회를 놓친 뒤 cinemAgora님의 리뷰를 보고 빨리 봐야겠다고 다짐했건만 연말연시를 보내며 다소 바빴다. 연애라도 한다면 연인과 함께 봤겠지만 ‘연애엔 무능한’지라 결국 홀로 극장에서 무척이나 깔깔대며 <과속스캔들>을 봤다.

지나고 나면 후회만 남는 게 학창시절이라지만 영화를 본 뒤 ‘나는 왜 중학교 시절에 저런 사고를 치지 않았을까’라는 후회가 몰려왔다. 대략 극중 나이가 서른여덟 정도인(중 3때 사고로 태어난 딸이 22살이니) ‘현수’(차태현 분)가 할아버지가 됐다니 끔찍하면서도 저런 손자(할아버지의 작업까지 돕는)라면 그것도 복이겠다 싶었다. 참고로 필자는 올해 서른여섯이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에서도 고1때 미혼모가 된 딸이 ‘정남’(박보영 분)처럼 예쁘고 바르게 자라고 손자까지 천재 피아니스트에 티 없는 어린 아이일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이처럼 유쾌한 영화를 관람하고도 머릿속이 깔끔하지 않았던 까닭은 다른 데 있다. 사실 한국 영화에서 가장 좋지 않게 그려지는 직업군이 바로 검사와 기자 아닐까 싶다. 기자 가운데에도 특히 연예부 기자가 그렇다.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만 나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드는 영화 <과속 스캔들>에 단 한 명의 악역이 존재하는 데 그의 직업이 바로 연예부 기자다. 물론 정남의 첫사랑 ‘상윤’(임지규 분)도 악역 비스무리하게 나오지만 그는 다소 멍청하고 순진할 뿐 악역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가 경찰서에서 절규하다 차태현에게 얻어맞는 장면이 가장 코믹했는데 어찌 보면 이 경찰서 절규 장면은 <너는 내 운명>에서 황정민이 “은하야! 오빠가 구해줄게”라고 외치던 장면에 버금갈 정도로 절실(?)하다. 참고로 상윤 역할인 배우 임지규의 출세작이 <은하해방전선>이니 참 묘한 연관성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그 이름도 위대한 ‘봉필중 기자’(임승대 분)를 살펴보자. 남자 연예인의 섹스 비디오를 특종 보도한 그는 유난히 이런 연예인의 구린내를 감지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나셨다. 자신이 보도한 기사로 난처해진 연예인을 바라보며 짓는 묘한 미소는 너무 매력적이라 반할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그렇다.
저런 뛰어난 기자가 현실이 아닌 영화 속에만 존재한다는 게 나로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하물며 이 글을 쓰는 기자마저도 영화를 보는 내내 현수네 ‘과속 삼대’(영화의 본래 제목이기도 하다.)에게 감정이 이입돼 ‘봉 기자’를 파렴치하고 못된 놈으로 생각하게 된다. 극장을 빠져 나와 담배 한개비 입에 문 뒤 생각했다. ‘과연 내가 봉 기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기본적으로 봉 기자는 대단한 실력의 기자다. 다만 현실 세계, 적어도 대한민국 연예계를 취재하는 연예부 기자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유형의 연예부 기자다. 우선 그가 특종 보도한 섹스비디오 사건을 보자. 물론 우리 사회 역시 몇 차례의 대형 섹스비디오 사건을 겪은 바 있다. 하지만 봉 기자의 특종과는 거리가 멀다. ‘O양 비디오’의 경우 이미 세운상가 등에서 판매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B양 비디오’ 역시 인터넷 불법 성인사이트에서 유통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연예부 기자의 역할은 ‘누구의 섹스비디오가 유통되고 있다’는 사회 현상에서 시작된다. 반면 봉 기자는 감춰진 연예인의 섹스비디오를 찾아내 보도한 것인데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느 톱스타의 섹스 비디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지라도, 또한 그것을 입수했다 할지라도 이는 보도 가치가 없는 사안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비디오를 찍건 말건 이는 그의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안일 뿐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누군가 문제의 섹스비디오를 입수해 공개하겠고 협박이라도 해야 기사 요건이 충족된다. 영화를 보면 봉 기자는 입수한 섹스비디오를 본인이 직접 유통시켜 기사 요건을 충족시킨 뒤 기사화할 역량(?)까지 갖춘 것으로 보이는데 적어도 대한민국 연예부 기자들은 그런 짓거리는 안한다.

봉 기자가 섹스비디오를 직접 유통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까닭은 한물 간 연예인 현수네 가족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보인 무리수 때문이다. 영화가 정확하게 당시 정황을 그리진 않고 있지만 내용 흐름이나 정황으로 볼 때 봉 기자가 현수의 손자 ‘기동’(왕석현 분)을 잠시 납치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특종이 좋다지만 어린 아이를 납치하는 기자가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 이는 기자 사회에 대한 엄연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목이지만 감독도 이를 의식했는지 봉 기자가 기동을 데리고 나가 실종된 뒤 다시 나타날 때까지의 정황을 불명확하게 그려놓았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가장 비현실적이라고 여긴 대목은 봉 기자의 결혼이다. 일 열심히 하는 연예부 기자는 연애할 틈도 없고 따라서 결혼은 꿈도 못 꾼다. 봉 기자처럼 연예인의 구린내를 맞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 특종만 거듭하는 연예부 기자라면 당연히 결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절반에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이 신 기자, 역시 결혼은 꿈도 못 꾸고 있다. 오죽하면 ‘연예엔 능하나 연애엔 무능하다’고 스스로를 평가했을까. (다만 이 부분은 노총각인 필자의 다소 많이 왜곡된 시선일 뿐 대부분 연예부 기자들의 현실과는 상당부분 동떨어져 있다.)


 
다만 결혼을 앞두고 웨딩 촬영을 하다 우연히 사진작가의 컴퓨터에서 현수가 웬 여성과 함께 있는 사진을 발견하는 장면은 현실적이다. 기자라면 언제 어디서나 취재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어딜 가나 ‘디카’와 ‘녹음기’를 늘 챙겨야 한다는 선배 기자들의 충고가 끊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속 봉 기자를 보며 얻은 교훈이 있다면 ‘USB 메모리’도 늘 갖고 다녀야겠다는 것. 필자라면 당장 그 컴퓨터에서 사진부터 몰래 다운 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관객들의 봉 기자에 대한 미움은 현수의 기자회견 장면에서 모두 풀렸을 것이다. 섹스비디오로 잠적했던 남자 스타가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봉 기자에게 폭행을 가한 것. 이 장면 역시 다소 비현실적이다. 우선 속 시원한 기자 폭행 장면은 말이 안 된다. 그 연예인이 바보겠는가, 정 때리고 싶다면 조용한 장소가 얼마나 많은데 매스컴이 몰려있는 기자회견장을 거사의 장소로 삼게. 다만 그 앞부분 기자회견은 현실적이다.

연예부 기자들 사이에선 특종과 관련된 로망이 바로 이런 기자회견이다. 자신이 특종 보도한 사안을 가지고 해당 연예인이 기자회견을 하는 것. 다른 기자들이 기자회견 내용을 받아 적느라 정신없을 때 뒤편에 기둥이나 벽에 기대 여유 있으면서도 묘한 웃음을 짓는 거다. 하긴 술자리에서 어느 선배 기자는 몸을 15도 가량 기울여 벽에 기대고 다리를 겹치게 꼰 뒤 팔은 가슴 앞으로 팔짱끼는 등 기자회견 장에서의 특종 기자가 취해야 할 포즈까지 알려 주기도 했다. 그런데 관객의 시선에선 그런 봉 기자의 모습이 너무너무 얄밉다. 그러다보니 갑작스럽게 봉 기자가 폭행당하는 장면에서 엄청난 개운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영화 <과속스캔들>을 본 뒤 필자를 괴롭힌 가장 큰 사안은 바로 연예부 기자의 태생적인 한계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서른여덟의 한 물 간 남자 연예인이 있다. 그런데 그에게 몰래 숨겨둔 딸은 물론 손자까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황에서 이를 기사화하지 않을 연예부 기자가 얼마나 될까. 물론 봉 기자처럼 어린 아이를 납치하는 등의 극단적인 방법이 아닌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 사실을 취재했을 경우의 얘기다. 그가 딸과 손자를 둔 할아버지라는 부분은 분명한 팩트다. 만약 봉 기자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됐고 팩트에 입각해 기사를 썼다 할지라도 관객들의 미움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 관객들은 현수네 가족의 가슴 아프지만 감동적인 사연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 기자는 이를 몰랐고 대부분의 연예부 기자들 역시 여기까지는 알 수는 없다.

물론 기자는 이론상으로 팩트를 확인하는 사람이 아닌 팩트와 진실 사이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런 팩트를 확인하는 것조차 힘겹다. 그런데 진실보다 더 접근하기 힘든 그네들의 사연까지 다 확인하는 데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경험상으로 볼 때 봉 기자가 잘못한 부분은 현수와의 직접 접촉이라는 중요한 과정을 생략했다는 부분이다. 뭐 사실 봉 기자의 잘못이라기 보단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한 강형철 감독의 잘못이겠지만. 현수를 직접 만나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연까지 듣는 과정을 거쳤어야 한다. 영화 전반부에 나오듯 둘은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속내를 털어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어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직접 접촉을 시도할 경우 사실을 뻔히 확인하고 왔는데도 계속 아니라고 부인하는 연예인들이 있다. 아니 많다. 사실 기자 입장에선 고마운 상황이다. 확인한 팩트 내용을 위주로 기사를 작성한 뒤 ‘해당 연예인 측은 사실무근이라 답했다’는 입장만 더해주면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반면 사실을 인정한 뒤 사정을 설명하며 기사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경우 어려움이 커진다. 게다가 그 사정이 충분히 공감할만한 사안일 땐 기자 역시 사람인 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이 상황에서 상대방을 잘 설득하는 게 진정한 기자의 능력일지도 모른다.

현수의 경우를 기사화하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봉 기자는 그와 접촉해 이미
현수가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강조했어야 한다. 괜한 스캔들에 휘말렸다가 나중에 그게 딸이라고 밝혀졌을 경우 세간의 시선이 더 곱지 않을 수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또한 이를 잘 활용해 이미지 변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부분도 언급해야 한다. 실제 영화에서도 현수는 모든 사실이 알려진 뒤 이미지가 더 좋아져 CF 제안까지 받게 된다. DJ로도 뜬다. 이런 상황을 위해선 최초 기사가 호의적이고 또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부분을 설득해 정식 인터뷰를 유도했어야 한다. 대부분의 연예부 기자들이 이렇게 일하고 있다. 그런데 봉 기자는 이런 과정을 무시한 채 아이를 납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납치가 아닌 아이에게 사실 확인만 한 뒤 돌려보냈는데 길을 잃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확인을 하려면 어렵더라도 ‘남현수’ 본인과 했어야 한다. 영화 속 상황의 경우 첫 기사가 봉 기자의 흥미 유발 고발성 기사였던 터라 더 큰 흥미를 유발하는 섹스 비디오의 주인공 연예인이 봉 기자를 폭행하는 뉴스에 밀리고 만 것이다. 요즘 세상은 흥미를 유발하는 대형사건보다 가족애 등을 강조하는 감동어린 뉴스가 더 잘 팔린다. 잘만 다듬었다면 남현수의 이야기가 훨씬 파괴력 있는 기사가 됐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지만 사실 요즘 연예부 기자들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욕을 먹고 있다. 필자 역시 얼마나 많은 비아냥과 벗하며 지내고 있는가. 영화 속 기자들은 대부분 너무 지나친 취재를 해서 욕을 먹지만, 현실에선 그 반대로 너무 취재에 게으르다며 욕을 먹는다. 취재 시스템이 변화하면서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게 현직 연예부 기자인 필자의 변명 섞인 항변이지만 사실 일정 부분 이런 지적의 소리가 일리 있게 들리기도 한다. 더욱 더 열심히 취재에 집중하겠다는 약속, 그래서 이왕 먹는 욕이라면 영화 속 기자들처럼 취재를 너무 열심히 해서 욕을 먹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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