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시절을 거쳐 초년병 기자로 들뜬 하루하루를 보내던 2000년, 필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에로 전문 기자’라 불리곤 했다. 당시만 해도 에로 비디오 업계가 마지막 불꽃을 한창 불태우고 있었고, 인터넷 성인 방송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에로비디오나 인터넷 성인방송을 취재할 기회가 종종 생겼다. 그런 경험이 기자의 세계를 궁금해 하는 친구들에게 들려주기에 가장 좋은 무용담이었던 터라 그런 얘기를 너무 남발해 ‘에로 전문 기자’라는 별명이 붙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는 기억이다. 지금도 여전히 ‘에로 전문 기자’로 불리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에로 비디오도 인터넷 성인방송도 시들해진 요즘 한국 사회는 성인업계가 발붙일 곳 없는 ‘아름답고 건전한’ 성지가 됐기 때문이다.


2001년 초 정부가 에로 비디오 업계와 인터넷 성인 방송 업계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인 이후 시들해진 성인업계는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디오 대여 시장이 대폭 줄어든 상황에서 모바일 성인 콘텐츠라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마련됐으나 SKT가 성인 콘텐츠 서비스를 중단하면서 그마저도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나마 케이블 성인 유료 채널이 마지막 활로였는데 시장이 너무 작았다. 결국 2007년 하반기 기준으로 에로 비디오를 제작하는 회사는 고작 두 개 뿐일 정도였다.


올해 초 오랜만에 만난 성인업계 관계자들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피어 있었다. 술잔을 오가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네들을 들뜨게 만든 것은 바로 IPTV라는 새로운 시장에 대한 기대감임을 알 수 있었다. 


IPTV, ‘Internet Protocol Television’의 약자다. 다들 알고 있듯이 초고속 인터넷망을 이용한 양방향 텔레비전 서비스로 방송국의 편성표에 맞춰 TV를 시청하지 않고 시청자가 스스로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선택해 볼 수 있다는 부분이 가장 큰 특징이다. 최근 방송통신융합이 언론학에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 통신 형태의 방송 서비스를 하는 IPTV가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IPTV 도입에 에로 업계가 흥분한 까닭은 에로 업계의 부활이 가능한 새로운 시장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비디오 대여 시장이 호황을 누릴 당시 에로 업계가 잘나갔듯이 이제는 비디오 대여점에 갈 필요 없이 IPTV를 통해 에로 비디오를 선택해 볼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것. IPTV 업체 입장에선 시청자들의 선택 폭을 넓히기 위해 좀 더 많은 에로 비디오를 요구할 것이니 다시 에로 비디오 제작 붐이 일어날 것이며, 그러다 보면 히트작이 등장하며 다시금 에로 비디오가 대한민국 성인 산업과 문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가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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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희망은 현실 앞에서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영상물 심의의 맹점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영상물 심의는 극장에서 상영하는 개봉 영화와 비디오로만 출시되는 비디오 영화로 구분되는데 심의 기준과 방식이 각기 다르다. 우선 개봉영화의 경우 ‘무삭제’라는 용어가 사라진 지 오래다. 몇 차례 헌법소원을 통해 영상물 등급위원회는 개봉영화의 등급만 결정할 뿐 특정 장면을 삭제하라고 요구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전히 영화 홍보에 사용되는 ‘무삭제 개봉’이라는 용어는 비현실적인 과장 문구일 뿐이다. 마지막 보루로 ‘제한상영가’ 등급이 있는데 이는 일반 극장에선 개봉할 수 없는 등급으로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하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는 영화는 1년에 두세 편에 불과하다. 영화 <색, 계>처럼 헤어누드는 물론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나오는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이유는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에서의 노출 장면을 허용된다는 기준인데, 과연 작품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일지 의문이다.


반면 비디오 영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영상물 등급의원회가 특정 장면을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 까닭은 개봉 영화 등급 심의에서는 사라진 ‘등급 보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상물 등급위워회 ‘국내 · 외 비디오물 등급분류 소위원회’가 해당 비디오 영화의 등급을 결정하지 않고 보류 판정을 내리면 제작사(또는 수입사)가 알아서 특정 장면을 삭제한 뒤 재심을 넣어야 한다. 어느 에로 업계 관계자는 “차라리 어느 장면을 삭제하라고 말해주면 좋은데 무작정 보류판정을 내려 등급을 받기 까지 몇 번씩 재심을 받아야 한다”며 “심의를 넣을 때마다 내는 등급 심의료도 만만치 않다”며 하소연한다.


그러다보니 상이한 심의 기준이 묘한 대비 구조를 형성해 낸다. <색, 계>처럼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의 경우 극장 상영 당시와 같은 기준, 다시 말해 헤어와 성기가 모두 나오는 상태로 비디오와 DVD가 출시된다. 게다가 ‘디렉터스컷’이라는 이름의 DVD는 극장 개봉 당시보다 더 적나라한 경우도 많다. 반면 비디오 영화는 성기는커녕 헤어누드도 꿈꾸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디오로 출시된다. 과연 <색, 계> 수준의 베드신에 익숙해진 이들이 가릴 거 다 가린 에로 비디오에 관심을 기울일까, 오늘 날 에로 비디오 업계가 처한 가장 큰 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런 맹점을 몇몇 영화수입업자들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일본 에로 영화를 수입해 극장에서 개봉하는 방식인데, 극장 개봉작이라고 포장하면 그만큼 노출 수위도 놓아지기 때문이다. 극장 개봉 방식도 눈길을 끈다. <일본남녀상열지사>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일본 영화가 그 시작이었는데 사실 이 제목은 영화수입업자가 임의적으로 붙인 제목일 뿐이다. <거리의 여인> <하리칼라 걸의 성적유희> <붉은 장미부인> <로토 섹스> 등 각기 다른 일본 에로 영화 네 편을 수입한 뒤 각각의 제목으로 심의를 받은 뒤 한 편으로 묶어 개봉한 것으로 이는 비용 절감을 위한 꼼수라고 볼 수 있다. 극장에서 단 하루만 상영해도 극장 개봉작이 되는 데 한 편씩 개봉하려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60~80분가량 분량의 영화 네 편을 묶어 옴니버스 영화 형태로 개봉한 것이다. 올 초부터 이런 형태로 조용히 극장에 개봉되는 일본 에로 영화들이 조용히 쌓여가고 있다. 영상물등급위워회 홈페이지에서 등급자료를 조회해보면 이런 방식으로 수입돼 심의를 받은 일본 에로 영화가 벌써 수십여 편에 이른다. 당연히 무삭제 등급이다. 이렇게 수입된 일본 에로 영화들은 본격적인 IPTV 시대의 도래와 동시에 무삭제로 시청자들을 만나게 될 전망이다. 여전히 가릴 때 다 가린 한국 에로 비디오로는 대적이 힘든 강적들임에 분명하다.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 사람들은 매우 고급문화를 향유하려 한다. 그래서 이렇게 에로 업계에 대한 글을 쓰는 기자까지 비하해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성생활이 차지하는 영역과 의미를 생각할 때 에로 비디오와 같은 성인문화를 무작정 터부시 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존귀한 건전성은 의도적으로 성인문화를 외면한다. 그러다보니 이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영상물 심의 과정에서의 맹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IPTV 성인물 영역 역시 일본 에로 영화들로 꽉 채워질 공산이 크다. 기성세대들이 젊은 시절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들어온 불법 잡지와 포르노를 통해 성인문화를 즐겼듯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IPTV를 통해 일본 에로 영화를 보며 성인문화에 다가갈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성문화를 사라져가고 있다. 해외의 변태적인 성인물이 해학을 밑바탕에 둔 한국 고유의 성인물의 자리를 서서히 빼앗고 있는 것.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독도 문제에 민감해지곤 하는 데 그렇게 독도를 열심히 지키는 사이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밤 문화를 그들에게 내어준 게 아닐까. 우리가 건전하고 고급스러운 민족인 양 체면 차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 한국의 밤을 일본에 헌납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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