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민감성 체질의 독자에겐 스포일러로 여겨질 내용이 살짝 포함돼 있음)
이혜영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아기 낳고 10개월 지난 뒤부터 한 건데, 그 작품으로 알려진 뒤로는 고만고만한 배역만 들어오더라고. 엄마 역할만. 이건 내가 아니라도 할 사람이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오들희’는 자기 일을 가진,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여자였지.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더 게임>이 끝나고 어떤 대본이 들어올까 궁금하네.
최광희 <피도 눈물도 없이>가 나름대로 의미 있었던 지점은
이혜영 그랬었나? 사실 <피도 눈물도 없이>도 처음 시사로 봤을 때 조금 실망했다. 나는 그래도 두 여자의 이야기로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피도 눈물도 없이> 2002
이혜영 그러게. 이제 또 셋째까지 가지면 나는 다시는...하하.
최광희 TV 시리즈에서의 캐릭터를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 전의 이미지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팜므 파탈적이고, 약간 초현실적인 느낌이랄까?
이혜영 거기에 더 적성이 맞는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한번 해보고 싶었던 작품이긴 한데...그 때도 말이 많았다. 거친 삶의 현장에 있는 여성인데, 음색이 불만이다, 소리가 경선이라는 배역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지적들을 받았다. 내 목소리 톤에서 오는 한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내 매너리즘이기도 하고 내 개성이기도 하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힘들고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반면, <더 게임>의
최광희 나한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그런 느낌?
이혜영 그렇지만 내가 그런 장르를 특별히 선호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할 뿐이다.
최광희 사실 배우로서 내 고유의 캐릭터를 이렇게 만들어가겠다, 설정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지 않았나.
이혜영 그렇지. 가진 걸로 잘이나 하면 다행이지.
최광희 목소리 톤이나 발성이 연극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초창기에 연극을 해서 그런 건가?
이혜영 본래 소리가 그렇다. 초등학교 때부터 애들이 그랬다. 너 소리가 왜 그래? 너 목소리 만들어서 내? 화장 안하고 아이들이랑 같이 다니면
최광희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은 없나?
이혜영 왜 없겠어. 지금은 일단 영화를 열심히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야...하하. 아이들 갖고 나서는 연극 거의 안 했다. 안 한 지 한 10년 된 것 같다. 대본은 계속 들어오고 있다.
최광희 너무 까다롭게 고르는 거 아닌가?
이혜영 솔직히 사생활도 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냥 바쁜 거다.
최광희 하긴 엄마 역할도 중요할 테고.
이혜영 중요하지! 낳았으니 어떡해?
최광희 낳으려고 낳은 거 아닌가? 하하. <피도 눈물도 없이> 때 인터뷰에서 다섯 살 난 첫딸 이야기 잠깐 했는데, 지금 11살 정도 됐으니 엄마가 뭐 하는지 정도는 알 때가 됐겠다.
이혜영 지금도 내가 뭘 하는지 잘 모른다. 일부러 찾아서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그런 데 익숙한 환경에서 크다가 자연스럽게 배우의 꿈을 가지게 됐는데, 자꾸 그런 걸 딸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완전히 분리해서 한다.
최광희 지금 탄탄한 활동을 하고 있는 30대 여배우들이 적지 않은 데 반해
이혜영 열심히 할게, 그러니까. 미숙이 언니랑 다시 전화도 하고 같이 열심히 하자고 해야지.
최광희 활동하는 데 나이라는 게 현실적인 제약으로 느껴질 때는 없나?
이혜영 전혀. 26살 때 이미 날 43살로 본 사람도 있는데 뭐. 어렸을 때 아주 노련한 척 하면서 이미 나이 많은 여성 역할을 했기 때문에 별로 못 느끼겠어, 그런 거.
최광희 이를테면 사람들의 시선이라든가, 혹은 캐릭터의 제약이라든가.
이혜영 그런 거 별로 못 느껴, 진짜. 어렸을 때도 청춘 멜로 영화의 이십대 연기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때 오히려 한 쉰 된 것 같으신데 참 안 늙는다는 얘기까지 들었을 정도니까.
최광희 배우에겐 구축된 이미지가 강점이 되긴 하지만 굴레가 되기도 한다. 당신의 경우, 상대방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강해 보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휴먼 드라마에는 잘 안 맞겠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거다. 강한 느낌의 초현실적인 캐릭터나 장르 영화 외에는.
이혜영 그래서? 그런 영화 중에 내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게 있나?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런 영화로 크게 부각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런 이미지를 줄까? 왜 그럴까?
최광희 사실 나도 인터뷰 하기 전에 약간 부담감을 가졌다. 도도하고도 강한 자의식을 가진 분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이혜영 그런데 직접 보고 얘기해보니까 어때?
최광희 수더분한, 동네 옆집 아줌마 같은 느낌?
이혜영 맞아. 하하하.
최광희 그런데 사람들이 갖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면, 그냥 그 컬러로 밀고 나가야겠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이혜영 난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 전혀 없다. 그냥 이대로 잘이나 했으면, 그런 생각은 들지.
최광희 잘이나 했으면, 이라는 말 자주 하신다.
이혜영
최광희 글쎄, <피도 눈물도 없이>가 그나마 가장 각인돼 있지.
이혜영 그래도
<더 게임> 2008
이혜영 아무하고도 교류 안 하지만 언제 봐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최광희 평소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다는 얘긴가?
이혜영 전혀 없다.
최광희 성격이 문제인가? 이 바닥이 문제인가?
이혜영 나한테 문제가 있겠지. 촬영 끝나면 그냥 바로 집으로 간다. 그러다 보니까 서로 잘 모를 수 있겠다. 앞으로 그런 것도 잘해 볼게. 헤헤.
최광희 스스로의 성격을 어떻다고 생각하나?
이혜영 까다롭고 낯도 잘 가리고. 그리고 약간 우울증이 있다. 사람들은 내가 우울하거나 연약하거나, 그런 수동적인 모습을 별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옆 사람이 피곤하니까.
최광희 그 얘기를 들으니 일상적인 세계에서 동 떨어져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 이를테면, <선셋 대로>에 나오는 글로리아 스완슨하고 묘하게 중첩 되는 부분이 있다.
이혜영 그런 얘기 하는 기자는 또 처음 보네.
최광희 기분 좋은 소리인가?
이혜영 보는 눈이 있다는 거지, 날카로운 데가 있네. 하하하.
최광희 아무튼 그래서 사람들이 약간은 거리감을 두고 보는 게 아닐까?
이혜영 내 세대가 그런 거지. 내가 어렸을 때는
최광희
이혜영 뭐, 그렇게 생각하라 그러지. 나는 거기에 맞출 생각이 없고.
최광희 요즘 후배들을 보면 연기 패턴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은 안 하나?
이혜영 이를테면?
최광희 <피도 눈물도 없이>에 함께 출연했던 전도연도 그렇고.
이혜영 글쎄 나는 못 느끼는데, 감독들이 얘기하더라, 좀 다르죠? 이렇게. 나는 근데 잘 모르겠어, 뭐가 다른 건지. 다만, 도연이는 그런 게 있어. 우리 때 같으면 어떤 신이 주어지면 생각을 많이 하고 몰입을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그런데, 도연이는 그냥 해, 그냥. 그건 세대가 다른 데 따른 거지. 나도 특별히 변화를 가져야 할 역할이라든가, 좀더 달라진 걸 증거해야 할 계기를 만나게 되면 다른 패턴의 연기가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일부러 달라져야 한다거나 고민스럽거나 하지는 않다. 그래서 더욱 독보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하하.
최광희
이혜영 만나고 싶은 감독들이 몇 명 있긴 하다.
최광희 이를테면 누구?
이혜영
최광희 그건 곧 기 싸움에서 당신을 압도당할만한 감독을 못 만났다는 뜻인가?
이혜영 지금까지 만났던 감독들은 다 나를 좋아했고, 잠재된 게 많다고 인정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대하는 바가 많았다. 이를테면, 왜 그거 있잖아, 너 잘하는 거, 이런 식이었다. 그럼 나는 그게 뭐예요? 그러지. 난 나대로 한 프로젝트를 통해서 고통의 시간을 경험하며 커가고 싶었다. 난 한 영화 찍으면서 기분이 달라지고 그래서 표정이 바뀐다. 방문 열 때 다르고 닫을 때 표정이 달라, 마치 딴 사람처럼. 그래서 그걸 잡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
최광희 싸워야 할 때는 좀 싸워야 하는데 너무 좋은 게 좋은 식이었다, 이 말씀인가?
이혜영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된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아. 프로덕션 전체가 화목하게 잘 끝나는 것을 바라는 편이라서 싸우고 쟁취하고 그런 걸 안 했던 것 같다. 앞으론 그런 것도 팍팍 싸워서 얻어내든지, 바꿔볼까 봐. 하하.
최광희 부디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감독을 만나 좀더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예전의 토크2.0 시절엔 마지막에 행복하냐는 질문을 꼭 했다. 다시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혜영 행복해.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야. 잘될 것 같아, 2008년엔.
PHOTOGRAPHER 김병구
의상협찬 – 이세이미야케, 티슈즈, GIORGIO FERRI, CHOII
FILM2.0 설합본호(토크2.1)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