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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은 카메라의 움직임을 극도로 자제하는 영화 감독이다. 줌인이나 줌아웃, 클로즈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이 완고한 예술가는 카메라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거나 불가피할 경우에만 아주 느릿느릿 패닝을 할 뿐이다. 그것도 주로 등장 인물이 프레임 바깥으로 걸어 나간 뒤에야 졸다 깬 사람처럼 더디게 뒤따라 간다. 나처럼 성질 급한 관객은 그 호흡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경계>를 보면서도 속으로 몇 번 외쳤다. '빨리 돌리란 말야, 이 게으름뱅이!'

그러므로 장률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존 영화보기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함을 뜻한다. 인물의 상황과 배경을 시각화해 제시하는 그의 방법론이 '응시와 관조' 또는 그를 통한 '사유의 투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영화는 대개의 관객들에게 고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른바 주류적이지 않은 예술을, 피카소나 잭슨 폴락의 그림을 응시하는 듯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면, 둑이 터진 듯 치고 들어오는 감정의 파고가 시야를 통해 가슴 속으로 급습해 들어오는 전율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 작심이라도 한 듯, 부동의 지점을 급히 떠난 듯, 손에 들린 카메라가 절망과 격정, 혹은 관조와 해방의 경지에 이른 인물의 뒤를 바짝 뒤쫓는 바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젖어드는 눈시울에 깜짝 놀랐다. <망종>에서도 그랬고, 이번 영화 <경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단순히 눈물샘을 자극하는 조장된 감동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슬픔, 막막함, 그리고 처연함 등 온갖 복잡한 감정이 융화돼 마그마처럼 치솟아 올라오는 그런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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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에 이어 이번에도 최순희 이야기다(그래서인지 이번에 순희를 연기한 배우 서정은 ,망종>의 순희(류연희)와 놀랄만큼 흡사한 캐릭터를 재연하고 있다). <망종>에는 김치 팔던 조선족 여인이었던 그녀가 이번 영화 <경계>에서는 어린 아들 창호(<망종>의 창호는 기찻길에서 놀다가 죽는다)의 손을 잡고 막막한 몽골 초원의 외딴 집으로 흘러 든 탈북 여성이 됐다. 두만강이라는 경계를 넘어 경계 없는 초원에 왔지만, 이곳에도 경계는 존재한다. 갈 곳 없는 순희와 거처를 공유하는 몽골 남자 헝가이는 어린 딸과 아내를 도시에 보낸 채 사막과 초원의 경계에서 투쟁 중이다. 두 사람간의 언어의 장벽은 경계가 되지만, 어린 창호는 그 경계를 훌쩍 넘는다. 초원을 살리려는 헝가이의 노력에 두 사람은 노동으로 화답하고, 그 또한 경계를 지운다.

남조선으로 떠남을 재촉하는 엄마와 달리 몽골 아저씨의 거처에 남길 원하는 창호는 초원에서 대화를 나눈다. "창호는 여기가 좋니?" "여긴 사람이 없잖아." "창호는 사람이 싫어?" "사람이 없으면 안전하니까." 사람이 없으면 안전하다. 맞는 말이다. 사람은 늘 경계를 만든다. 사람들 속에 언제나 참기 어려운 경계가 있다. 그러나 홀로 있어야 하는 외로움을 이겨내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북한을 탈출하면서 남편을 잃은 순희는, 헝가이의 취기에 의존한 구애를 뿌리친 대신, 다짜고짜 가슴을 만지는 젊은 군인의 몸은 거부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또 다른 경계가 생긴다.

장률은 묻는 것 같다. 왜 우리는 선을 긋고 말뚝을 박고 살 수밖에 없을까. 경계 짓기가 인간의 숙명일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것 말고는 무엇이 있겠냐고. 골치 아픈 문제다. 속 편하게 시대의 무게를 핑계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원시적 삶의 조건을 함의한 초원을 배경으로, 그 화두를 좀더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그러니 더 머리가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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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장률 감독, 신동호(창호),서정(최순희)


시사 전 무대 인사에서 장률 감독은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몽골 초원에 가 있다"고 했다. <경계>를 찍으면서 그곳에서 찍을 다른 영화들까지 계획을 해 놓았나 보다. 이 경제적일 수밖에 없는 비주류 감독은 시사회에 참석한 스탭들에게 물었다. "시사 끝나고 저와 함께 몽골 초원으로 다시 가실거죠?" 그들중 누군가 짧고도 분명하게 답했다. "아니요!" 영화 <경계>를 찍으면서 그들 사이에도 경계가 생겼나 보다. 그래도 그 풍경은 살갑고 귀여워 보였다. 배우들과 제작진에겐 마음대로 씻고 먹을 수 없는 초원이라는 환경 자체가 경계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계 짓기가 숙명이라지만, 경계는 때론 뛰어 넘으라고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경계와 경계 사이에는 늘 어디론가 뻗어 있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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