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군

영화 이야기 2017.07.31 17:56 Posted by cinemAgora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는 유명한 속담이다. 영화 <대립군>을 보며 든 생각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은 훌륭하다. 나라가 나라일 수 있는 것은, 이름 없이 희생을 자처한 무수히 많은 ‘익명’의 백성이 존재했기 때문임을 웅변한다. 누군가의 군역을 대신해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 영화 속 조선의 백성들이, 임진왜란의 난리통에서도 싸움터를 버리지 못했던 그들이 영화를 통해 소환된다. 하여, 영화는 그들, 또는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다. “국가는 국민입니다“라는 영화 <변호인>의 외침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캐스팅도 괜찮다. 이정재와 여진구는 각자에게 주어진 캐릭터를 비교적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이 영화는 사실상 백성의 익명성을 상징하는 대립군 ‘토우’(그의 이름은 영화 내내 한 번도 불려지지 않는다.)와 의주로 도망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의병을 모으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세자 광해군의 처지를 슬쩍 등치시킨다. 광해 역시 어쩌면 무능한 선조의 대립군이었음은 마찬가지라는 논리는, 비록 토우가 국가로부터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는 봉건 사회의 ‘핍박받는 개인’ 그 자체일지라도, 비록 세자가 봉건적 신분질서의 꼭대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두 인물을 점차 같은 입장에 서게 만드는 이야기는 영화의 극적 구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여지가 충분하다.

■스포일러 주의

그러나 문제는 디테일이다. 그저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립질’에 나선 이정재는, 왜 세자의 입장에 그렇게 쉽게 동화되는가. 여기에 의문 부호가 생긴다. 왜냐하면 대립군에게 국가란 자신의 처지와 전혀 무관한 것이며, 영화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그들이 설령 나중에 청나라가 될 오랑캐의 편에 선들, 시대의 맥락 안에서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건적 신분 질서에 종속되기로 마음 먹은 이정재의 선택은, 그의 처지와 정면으로 대립(對立)한다. 때문에 이 심적 변화에는 주인공을 불가피하게 압박하는 거대한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쉽게도, 감독 정윤철은 그걸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극적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은 여진구가 연기한 광해인데, 어쩔 수 없이 분조를 떠맡은 유약하기만 한 인물에서 쳐들어오는 왜군들을 향해 스스로 활 시위를 당기는 과정의 변화는 설득력이 있다.

여전히 거슬리는 디테일들. 이솜이 연기한 나인은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광해의 곁을 꿋꿋이 지키는 걸까. 그 부자연스러운 커플링은, 결국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슬로 모션으로 처리된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위한 작위임을 눈치 챌 수밖에 없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게 아니라 결과를 위해 원인을 소비적으로 배치하는 시나리오는 그리 훌륭하다고 평할 수 없다. 내관은 왜 광해를 배신한 것일까. 그리고 왜 그는 죽는 순간에 광해의 정치적 비하인드 스토리를 주절주절 읊는 것일까. 어이 없게도, 우리는 피를 토하는 내관의 입을 통해 조선 왕조사 수업을 듣는다. 중간 중간 광해 일행을 공격하는 마스크 쓴 인간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실타래가 미처 풀리지 않은 채 <대립군>은 (힘들여 찍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다소 엉성한) 공성전 한 번 배치하고 익숙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어떤 시대극이든,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현재의 열망 또는 결핍에 의해 불려 나온다. <대립군>의 시사점은, 지금 이 시대의 무엇과 조우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적으로만 올바르되 지루한 이 영화는, 딱히 지금의 정치 사회적 국면을 살아가는 대중의 무의식과 광범위한 접점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BLOG main image
3 M 興 業 (흥 UP)
영화, 음악, 방송 등 대중 문화의 틀로 세상 보기, 무해한 편견과 유익한 욕망의 해방구
by cinemAgora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159)
찌질스(zzizzls) (3)
영화 이야기 (679)
음악 이야기 (34)
TV 이야기 (29)
별별 이야기 (117)
사람 이야기 (13)
3M 푸로덕숀 (156)
애경's 3M+1W (52)
민섭's 3M+α (27)
늙은소's 다락방 (26)
라디오걸's 통신소 (1)
진영's 연예백과사전 (4)
순탁's 뮤직라이프 (10)
수빈's 감성홀 (8)

달력

«   2017/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NM Media textcube get rss DNS Powered by DNSEver.com

3 M 興 業 (흥 UP)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cinemAgora [ http://www.ringblog.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티엔엠미디어 DesignMyself!
cinemAgora'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NM Media.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