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플레이스와 종이달

영화 이야기 2015. 7. 21. 19:32 Posted by cinemAgora

2010년 초에 프랑스의 소설가 기욤 뮈소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구해줘>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 등, 주로 여성 취향적인 장르 문학을 베스트셀러로 등극시키며 한국에도 고정 팬이 상당히 많은 작가다. 그의 내한 행사를 내가 진행했다. 영화평론가인 내가 프랑스 소설가의 팬 미팅을 진행한 건, 그의 작품들 대부분이 다분히 '영화적'이라는 출판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행사에는 꽤 유력한 영화 제작자도 참가했는데, 그는 기욤 뮈소에게 "당신의 책을 한국에서 영화화한다면 판권을 팔 의향이 있느냐"며 직설적으로 물었던 기억이 난다.


프랑스 소설을 한국영화로? 이건 사실 그만큼 국내 문학 지형 안에서 영화화할만한 작품이 적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좋은 작품이란 무엇일까. 일단 제작자들은 장르 문학을 첫 손으로 꼽는다. 문학 작품이 스릴러, SF, 미스터리, 판타지 등의 장르적 요소를 갖추고 있을 때, 영화로 각색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영화로 각색할만한 장르 문학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우스개 소리로, 나는 강연을 할 때 한국 문학의 주인공들은 태반이 백수이며, 내면으로만 침잠하며 하나같이 매우 사변적이라고, 조소하고 다닐 정도다. 요컨대 주제 의식은 있지만 이야기가 없다는 얘기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를테면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이 스릴러 문학으로서의 형식과 내용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은 류승룡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 장르 문학의 척박한 현실과 달리, 미국과 일본은 탄탄한 장르 문학의 저변을 갖추고 있다. 일본만 해도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이사카 코타로 등이 풍성한 영화 원작의 제공자들로 기능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다 슈이치 등의 순문학적 전통과 별도로 든든한 시장을 갖추고 있는 추리 문학은 일본 영화의 믿음직한 원천 소스가 되고 있다. 미국은 잘 알려진 아이작 아시모프나 필립 K. 딕 등의 SF 문학을 비롯해, <LA 컨피덴셜><블랙 달리아> 등을 쓴 제임스 엘로이, <나를 찾아줘>나 최근작 <다크 플레이스>의 원작자 길리언 플린을 비롯한 스릴러 소설의 저변도 튼실하다.


7월 23일 개봉 예정인 <종이달>은 일본의 대표적인 여류 작가 가쿠다 미쓰요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죽이러 갑니다> <8일째 매미> 등으로 잘 알려진 가쿠다 미쓰요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심리를 세밀하게 포착해는데 정평이 나 있다. 여주인공을 흥미진진한 사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가운데, 관객들이 공감할만한 폭넓은 감수성을 건져 올린다. 미야자와 리에를 앞세운 영화는 그런 원작의 주제 의식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하는 가운데, 제법 묵직하고도 긴 여운을 남긴다.


샤를리즈 테론이 주연한 <다크 플레이스>(7월 16일 개봉)도 훌륭한 원작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원작자 길리언 플린이 <나를 찾아줘>에 이어 각본 작업에 참여했고, 그런만큼 한 편의 잘 쓰여진 찰진 소설을 한달음에 읽는 기분이 든다. <매드맥스>에 이어 또 한번 연기파 미녀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샤를리즈 테론이 둔중한 영화적 무늬를 아로새긴다. 샤를리즈 테론 자신은 15살 때 어머니가 총을 겨눈 아버지를 정당방위 사살했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런 개인사적 비극이 그녀가 극 중의 비슷한 역할인 리비 데이에 빙의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두 편의 영화 모두 훌륭한 원작 소설이 훌륭하게 각색된 모범 사례다. 이쯤 되면 거꾸로 장르 문학의 저변이 취약한 한국의 현실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영화 제작자들은 나보다 더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겉으로만 창의성 운운하면서 작가를 홀대하는, 이 이상한 "창조 경제"의 나라에선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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