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KBS '황정민의 FM 대행진'에 출연해 영화 <노아>를 소개했습니다. 소개 말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21세기에 신이 보낸 노아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핵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지요."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신성 모독으로 들렸는지, 방송이 나가자마자 게시판에 "핵은 인간이 만들었습니다." "사과하십시오" 등의 항의성 글이 올라왔습니다. 짐작컨대, 기독교 신자분들이 아니실까 합니다.
제가 영화 <노아>를 연출한 대런 아르노프스키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면서도 결코 기독교적 세계관과 종말론의 틀에 갇혀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하느님"이나 "하나님(God)"이라는 표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창조주(Creator)"라는 표현을 쓰고 있죠. 만약 성서를 충실히 옮기는데 그쳤다면, 이 영화는 그냥 평범한 종교 영화의 수준에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화가 특정 종교의 범주를 벗어난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감독은 나름의 실존적 질문을 노아라는 인물을 통해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영화 <노아>는 인간 세상을 멸하겠다는 신의 뜻을 수행하는 노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꽤 둔중한 화두를 함께 던집니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질문을 나름대로 분류해 본다면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인간은 신의 뜻대로 종말을 맞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시 리부팅되어야 할 것인가입니다. 노아는 전자의 입장입니다. 그게 창조주의 뜻이라고 믿죠. 이 창조주의 뜻은, 역설적이게도 많은 관객들의 열망을 배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신의 편에 서 있는 노아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이것이 이 영화의 진짜 플롯입니다.
또 한가지 질문은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도록 탄생된 것인가, 아니면 자연과 공존하도록 탄생된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론을 믿는냐 진화론을 믿느냐의 여부를 떠난 생태적 화두입니다. 두가지 입장 가운데 대런 아르노프스키가 어디에 방점을 찍고 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는 만약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21세기의 인간 세상을 굽어 본다면, 멸망에 이르게 만드는 도구로 핵을 선사한 것이 아니겠냐고 빗대어 말한 것이죠. 그걸 굳이 핵으로 비유한 것은 "선택권"이라는 키워드 때문입니다. 핵이야말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느냐에 따라 인류 멸망의 지름길로 안내하는 통로가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자율적이고도 주체적인 '선택권'이란, <노아>가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가장 의미심장한 주제 의식입니다. 신이 인간을 선택했듯,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