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챈스' 꿈을 이루기 위한 조건들

영화 이야기 2014. 3. 18. 06:49 Posted by cinemAgora



알려져 있다시피 영국의 ‘브리티시 갓 탈렌트’라는 프로그램은, 요즘 창궐하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의 프로듀서 사이먼 코웰이 포맷을 그대로 미국에 적용해 ‘아메리칸 아이돌’을 만들었고, 이 프로그램은 또 한국의 ‘슈퍼스타 K'로 이식된다. 브리티시 갓 탈렌트는 프로페셔널이 아닌 일반인 가운데 프로들의 뺨을 치는 재능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켰고,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킨 오디션 프로그램의 전형적 틀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전형적 틀이란 시청자들을 심사위원의 권력적 위치에 앉히는 것이고 출전자들에게서 ’드라마‘를 추출하는 것이다. 역경을 딛고 성공을 거머쥔 인생 역전의 드라마 말이다. 그런 드라마는 당연하게도 대중에게 감동을 안긴다. 시청자들 가운데 스스로의 처지가 미천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 드라마의 주인공이 겪어온 처지가 기구하면 기구할수록 감동의 강도는 세진다. 따라서 오디션 프로그램은 실력의 경연장임과 동시에, 조금 냉소적으로 말해 참가자들의 사연이 얼마나 더 기구한가를 경쟁하는 장이기도 한 셈이다. 

폴 포츠는 지난 2007년 브리티시 갓 탈렌트가 발굴한 가장 드라마틱한 사연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다. 천부적인 노래 솜씨를 가졌음에도 호감을 주는 외모와 거리가 멀었고,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의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였으며, 어렵게 들어간 베니스 오페라 학교에서 존경해 마지 않는 파바로티에게 망신을 당한 뒤 오페라 가수의 꿈을 접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상선 종양으로 한때 목소리마저 잃을 뻔 했다. 공장 일과 휴대폰 판매원 일을 하는 와중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원한 ‘브리티시 갓 탈렌트’의 첫 무대에서 그는 ‘Nessun Dorma' 한곡으로 순식간에 청중들을 휘어 잡으며 끝내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이런 드라마틱한 사연이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일 것이다. 폴 포츠의 사연을 영화화한 <원 챈스>(3월 13일 개봉)는 폴의 어린 시절부터, 이른바 인생 역전의 순간 까지를 담아낸다. 그런데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흔히 예상하듯 폴이 가진 불굴의 집념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그는 오히려 지나치게 주눅 들어 있고, 자신감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이 영화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생 역전의 기회는 찾아온다”는 상투적 교훈을 늘어 놓은 작품이었다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연신 하품을 해댔을 것이다. 

그런데 <원 챈스>는 오히려 폴의 주변 사람들에게 시선을 분산시킨다. 폴과 사랑에 빠지고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줄스, 대책 없는 휴대폰 대리점장 브래든,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등 폴을 둘러싼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집중함으로써, 폴 포츠라는 인간을 아끼고 또 그가 아낀 사람들로부터 영화적 드라마를 추출해내는 것이다. 

영화에 따르면, 아니 영화를 보고 있자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다. 첫째, 당연히 꿈에 걸맞는 재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사랑해야 한다. 폴은 노래 부르는 것이 너무 좋아, 틈만 나면 노래를 불렀다. 따로 연습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둘째, 그가 가지고 있는 꿈을 응원하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 이상 있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세상이 어떤 평가를 내린다 해도 끝까지 자기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폴에겐 행복하게도 아내인 줄스가 있었다. 자포자기하려는 순간마다 줄스는 폴이 노래를 부를 때 가장 그 답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주눅 들고 겁 먹을 때 ‘파바로티에게 복수하라’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건넬 줄 아는 사람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필수 조건은, 재능을 발굴해 내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폴 포츠에게 브리티시 갓 탈렌트가 없었다면, 혹은 사이먼 코웰이라는 명 프로듀서가 없었다면, 그는 발굴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페라 가수로 활동할 기회는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비록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독특한 무대로 발굴되었지만,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늘 밑에 숨어 있는 수많은 숨은 재능들을 발굴할 기회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성숙한 사회의 몫이다. 우리 사회에 그런 기회가 얼마나 열려 있을까? 

<원 챈스>를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생 역전? 좋은 얘기다. 하지만 모두가 로또 맞는 걸 꿈꿀 수밖에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 로또 맞은 이들을 보여주며 당신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러면서 밥 걱정 안하는 정도의 소박한 꿈이나마 누군가에겐 로또일 수 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로또의 당첨률을 높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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