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랑 이야기는 성장 드라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며 성장하기 위해선 고통의 순간들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는 성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상대의 취향을 위해 나의 취향을 바꾸는 법을 배운다. 어느 예상치 않은 순간에 상대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음을 배운다. 이별조차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 과정을 통해 인생은 이별의 연속이며, 그것을 감내하는 것임을 배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통한 성장통은 모든 고통을 통틀어 가장 고통스럽다. 사랑에 빠진 순간의 희열에 상응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그 불가해한 감정은 당사자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기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 상처까지 성장의 과정이라고 위안하는 건 제 3자의 입을 통해서나, 아니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래 아이들에겐 예쁘다는 평판을 듣지만, 아주 많이 평범한 여고생 아델(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의 성장도 사랑이라는 희열과 환멸의 터널을 통과한다. 같은 학교 남학생과 데이트하러 나간 길에 우연히 파란 머리의 엠마(레아 세이두)를 보았고, 아델의 가슴에 거부할 수 없는 달뜬 설렘이 내려 앉았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여지도 없이, 아델은 엠마에게 푹 빠져들고 말았다. 엠마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사랑의 연대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그렇듯, 두 사람 사이에도 욕망의 화살표는 엇갈린다. 서로가 너무나 잘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바람 구멍이 생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도피는 괴물 같은 상처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간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줄거리를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도무지 영화의 진가를 제대로 전달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론 줄거리가 중요하지 않은 영화도 있다. 독자들도 느꼈다시피, 이건 정말 보편적인, 한편으로는 매우 평범한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랑의 당사자가 둘다 여성이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다룬 퀴어 영화인가? 아니다. 그런 주제 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감독 압델라티프 케시시는 애초에 그런 계몽적 강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그는 다만, 아델이라는 소녀가 빠져들게 된 사랑의 다이어리를 집요하게 이어간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세 시간의 러닝 타임동안 아델은 모든 신에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아델과 엠마의 이야기라기보다 아델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아델의 심리적 변화를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상투적인 분석도 적절한 게 아니다. 연출자의 눈은 아델의 심리가 아니라 행동에 집중한다. 영화 내내 아델은 자신의 마음을 흔쾌하게 털어 놓지 않는다. 그녀는 수줍게 달뜨고 열정적으로 섹스하며 아프게 이별한다.


행동을 따라간다는 것은 관객에게 인물의 행동 이면의 심리적 변화를 유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델의 얼굴을 빈번하게 클로즈업하는 카메라가 미처 포착하지 않거나,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 것을 재구성해야 한다. 남자에게 관심이 없지 않은 그녀가 왜 하필 엠마에게 빠져들었는지, 그녀가 미술학도인 엠마의 세계에 어떤 의미로 개입되는 것인지, 그 개입을 통해 아델의 심상에는 어떤 충족과 결핍이 피어난 건지 등등.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은,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논평하거나, 두 사람 가운데 어떤 쪽에 동일시하며 편리하게 감정이입하지 않고도, 아델의 사뭇 모순적인 감정을 흔쾌히 이해할 수 있는 지경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이 영화는 숱한 멜로 드라마가 취하는 방식처럼 불가피한 이별의 장치를 동원해 관객에게 편리한 감동과 안타까움을 선사하지 않는 대신, 세 시간으로 압축된 보편적 사랑의 서사를 통해 관객이 아델을 사랑하게 만들며, 도대체 사랑이란 감정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가운데 관객을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지난해 칸영화제가 이 영화에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안긴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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