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우스운 상황이지만 한국 대중영화의 상투성을 외국 영화에서 거꾸로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수많은 한국 영화들이 반복하는 관습적 설정과 스토리 전개에 익숙해진 나머지 외국 영화에서도 상투적 예상을 하게 되는데, 그걸 비켜가는 경우를 목격하게 되는 상황 말이다. 오늘 본 영국 영화 <와일드 빌>(덱스트 플레쳐 감독, 12월 19일 개봉)이 그랬다.
주인공은 이제 막 가석방된 사고뭉치 빌이다. 아내는 9개월 전에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15살, 11살 두 아들만 덩그라니 지키고 있는 허름한 집으로 돌아온다. 범죄 경력이 있는 그를 마을의 못된 녀석들이 환영해준다. 그는 다시 범죄의 굴레에 발을 들여 놓기 일보직전이고, 올림픽 경기장 공사를 하며 생계를 지키는 큰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영화가 범죄 누아르의 외피를 두른 부자 휴먼 드라마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다음의 이야기 전개도 대충이나마 그려질 것이다. 아버지는 범죄의 소굴에서 발을 빼려 하지만 악당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고, 거대한 위협이 이들 가족들을 옥죄어 올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생사를 건 중대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이 예상은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영화 <와일드 빌>은 고비고비마다 다른 지점으로 슬쩍 슬쩍 빠져 나가는데, 기이하게도 그 '다른' 지점들을 통과하며 펼쳐지는 이야기가 훨씬 더 현실성이 넘친다. 감동이라는 틀에 이야기를 꾸겨 넣지 않고, 살아 있는 삶 속에서 감동을 퍼올리는, 우리에겐 낯설어졌지만, 지극히 당연한 접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영국 영화의 아주 중요한 전통이다. 칸이 사랑하는 '사회파 영화'의 거장 켄 로치의 작품들을 비롯해 <풀 몬티>나 <빌리 엘리오트> 등 하층민이나 노동 계급의 삶에 천착하는 전통 말이다.
<와일드 빌>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 영화는 평범해 보이는 듯한 가족 휴먼 드라마의 기둥을 중심으로, 성노동자, 미혼모 등 소외된 자들의 삶이라는 풍성한 결가지를 뽑아내며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따뜻하다는 게 반드시 눈물 콧물을 쥐어 짠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 영화에는 벼락 같이 폭풍 감동을 만들어내야 겠다는 신파적 강박 따위는 없다. 오히려 너무 담담하다 싶을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게 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진짜 눈물이다. 적어도, 지나치게 친절하다 못해 강요하는 듯한 자극에 조건 반사적으로 반응한 게 아니라, 영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건져 올린 '내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우리 관객들이 낯설어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게 되는 건 슬픈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