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렛 M. 로저스의 개혁 확산 이론(Diffusion of Innovations)에 따르면, 새로운 개혁 또는 혁신적 아이디어는 초기에는 완만한 상승 곡선을 이루다가, 어느 시점부터 이른바 변곡점, 또는 Tipping Point를 맞게 되면서 급속도로 퍼지게 됩니다. 어떤 개혁이든, 초기에는 채택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완만하게 상승할 수밖에 없는데, 로저스는 이 기간을 설득 단계로 규정합니다. 설득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공동체의 대다수가 그 개혁적 아이디어를 채택하거나 거부하는, 이른바 결정 단계로 넘어가게 되지요.
저는 문화적 개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대중 문화에서의 혁신적인 아이템은, 이를테면 서태지와 아이들이 초창기에 음악평론가로부터 채택 거부를 당했음에도 일정 기간이 지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듯, 어느 정도는 밀고 당기는 기간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대중문화 지형은 어떤가요. 개혁이 채택될 때까지 밀고 당기는 기간을 아예 허락하지 않거나, 허락하더라도 그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한마디로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리 혁신적인 아이디어라도 쉽게 실패로 귀결시키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선 창작 사이드보다는 플랫폼을 장악한 이들이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게 되는 건 당연한 노릇일 겁니다. 플랫폼 사업자들은 모험보다 안전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검증된 외국의 사례를 변형시켜 국내에 적용시키거나(예를 들어 슈스케!) 극장가의 와이드 릴리스 전략처럼 단기간에 치고 빠지는(Hit & Run) 마케팅에 익숙해 있죠.
지난번 포스트에 제가 90년대 말과 2천년대 초반에 대중 문화 아이콘으로 진입한 이들이 지금까지도 독점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카르텔 현상을 언급했는데, 그 때 그게 가능했던 것은, 적어도 기다려주는 기능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적 쇄신은 고사하고, 문화적 진화라는 게 굉장히 더디고 때로는 후퇴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영화야 오죽하겠습니까. 잘 아다시피, 작은 영화는 아무리 참신하더라도 극장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이고, 조금이라도 좌석 점유율이 안나오면 바로 종영되는 찬밥 대우를 받습니다. 입소문이 퍼져 Tipping Point까지 도달할 가능성이 원천 차단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2천년대 초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 같은 영화가 지금 개봉한다면, 그때만큼의 흥행 성적을 거둘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재능들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들고 출몰할 것이라는 기대는, 환경의 변화를 보지 못하는 굉장히 순진한 것입니다. 변곡점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문화, 충분한 설득의 기간을 보장해주는 문화, 그런 걸 만들자고 스크린 독과점의 폐해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먹고 살만도 해졌는데, 먹거리를 새로운 재능들과 나누자는 거, 그게 그렇게 실천하기 어려운 일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