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영화 <우리 선희>의 구성을 표면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윤똑똑이 남자 세 명이 밀당의 달인인 한 여자에게 유린당한다는 얘기렸다. 그런데 이 구도에서 영화가 끄집어 내는 인간의 모습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상이몽이다. 그 동상이몽은 곧 규정하려는 욕망과, 규정 받으려는 욕망의 엇갈림이다.
영화과 교수와 그의 후배, 또 그의 후배인 세 남자는 똑같이 선희에 대한 호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차례로 선희를 만나면서 대동소이한 얘기들을 한다. 이들은 선희라는 타자를 규정하는 주체로 군림한다. 규정의 내용은 한마디로 그녀가 골 때리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것. 그런데 규정의 방식은 상황에 따라 온도차가 생긴다. 골 때리는 것과 매력적이라는 두 상반된 측면 사이에서 어느 곳에 방점을 찍느냐는, 당연하게도, 이들 각자가 선희와 갖는 상황적 관계에 달렸다.
영화과 교수 김상중은 선희가 유학할 학교에 추천서를 써줄 권력을 지녔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선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추천서를 써줬다가 이내 선희와의 로맨틱한 상황으로 발전하자, 추천서를 다시 써준다. 두번째 쓴 추천서에서 구사한 어휘들은 첫번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되,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규정의 주체는 대상이 규정 받고자 하는 방식의 욕망을 수용한 것이다. 그 대가로 그는 선회와의 로맨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과연 선희도 거기에 화답하는 척 한다.
이 영화과 교수의 후배이자, 선희와 연인 관계였던 이선균의 선배인 정재영은 술김에 선희와의 짧은 로맨스를 경험한다. 그의 규정도 김상중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나 긍정 쪽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도 훨씬 더 직설적이었다. "너는 예뻐." 이 감상적 규정 앞에서 선희는 일시적으로 무장해제된다. 말그대로 일시적이다.
그에 비해 선희와 헤어진 뒤 애면달면 재회를 꿈꾸는 이선균의 규정은 딱 그의 마음만큼이다. "너는 내 인생의 화두야." 부담스럽다. 선희는 그의 인생의 화두가 되고 싶지 않다. 이별의 원망을 삭이지 못한 이선균의 입에서 김상중이나 정재영만큼 여유로운 정치적 수사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규정은 부정 쪽을 어슬렁 거린다.
어쨌든 세 사람의 동상이몽 속을 부유하던 선희는 미끄러지듯 이들의 손아귀 모두에서 스르르 빠져 나간다. 이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규정을 얻은 선희가 권력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습관적으로 타인을 규정한다. 그런데 그 규정의 행위에는 관계가 내포한 정치성, 그 자신의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규정을 원하는 이의 욕망과 엇갈리다가 접점을 만들어낸다. 그 접점 역시 당연하게도, 정치적이다. 그리하여 실체는 처음처럼 모호한 채 말만 잠시 남았다가 담배 연기처럼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