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1987년 6월 항쟁에 대한 선배들의 무용담을 자주 들었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얘기,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논쟁의 화두가 됐다는 얘기는 이렇다. 

"거리에서 전투경찰의 곤봉 세례와 최루탄에 쫓기고 있으면 자영업 시민들이 우리를 숨겨 줬다. 전투 경찰이 쫒아오면 셔터를 내려 버렸다. 혹시 누가 연행이라도 되면, 붙잡고 늘어졌다. 그때 학생과 시민은 하나였다. 그런데,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 선언을 했던 6월 29일 이후 그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그 선언은 단지 기만에 불과하다고 외치다가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면, 학생들이 숨어 들어가기도 전에 셔터를 내려 버렸다. 그들은 싸늘해졌다."

'자영업 민중의 이중성'은, 내게도 간과할 수 없는 고민거리였다. 누군가는 그들을 소부르조아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것도 민중의 속성 가운데 하나라며 보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그러니까 먹물 좀 먹었다는 지식 부르조아가 그들을 대상화했기 때문에 생긴 관념 가운데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6.29 선언 이후의 학생들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고, 운동의 관성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데모하지 않으면 어딘가 간지러운 공부 하기 싫은 한량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설국열차>에 대해 내가 느낀 불편함도 어쩌면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자영업자의 눈이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봉준호가 6.29 선언 이후에 데모를 하는 이상주의자 학생, 결국은 높은 자리를 예약해 놓은 이들의 순수의 확인 의식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금 더 먹물이 들어, 그 제스쳐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에 대한 알리바이를 개발했던 것인지도. 

그러니까 나는, 이 사회에 대한 억하심정을 지녔지만 언어화할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이 영화가 또 다른 차원에서의 계층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해독력이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의 계층. 

당신은 박찬욱의 <올드보이>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그 영화 속에서 남한 사회의 구체적 맥락에 대한 어떤 통찰을 얻었는가? 도무지 아무것도 얻지 못한 나는, 그러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그 영화가 그저 있어 보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담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전혀 통찰력이 없는 것일까? 배움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그 영화들이 쓰레기일까? 

박찬욱이라는 자본과 봉준호라는 자본이 CJ라는 자본과 결합한 예술이라는 이름의 그 유희. 그러니까 <설국열차>라는 진보 코스프레 유희가 우리 시대에 어떤 유효한 통찰을 안겨주는가? 인류학이고 맑시즘이고 개나발이고, 도대체 <설국열차>가 지금 시대의 자영업 민중에게 어떤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가? 어떤 슬픔을 안겨줄 수 있는가? 어떤 고민을 안겨줄 수 있는가? 그 슬픔을 추동하기 위해 박찬욱과 봉준호를 사랑하시는 이미경 부회장님의 CJ는 연일 스코어를 중계하고 있고, 봉준호와 그의 배우들은 열심히 무대인사를 다니고 있는가? 아니면 그의 갑에게 수익을 내어주기 위해 그러고 있는가? 

봉준호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더 쉽게 말하라. 아주 아주 쉽게 말하라. 쉽고도 멋진 예술도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수사는, 당신과, 당신의 영역에 닿고 싶어 환장하는 지식 부르조아들의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으나, 세상을 바꾸면 잊혀질까 두려운 이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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