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사는 한 땅부자 노인이 있다. 전직 군인 출신인 그는 종업원만 십수 명인 식당을 운영하는데다 가진 땅만 팔아도 수십억 대 부자다. 군인 출신과 부자, 왠지 이 두가지 요소를 더하니 그의 정치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된다. 과연 그렇다. 그는 평소 “빨갱이들은 모조리 잡아 족쳐야 한다”느니 노조원들 앞에서 “아가리를 찢어버리겠다”는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시쳇말로 ‘수구꼴통’, 줄여서 ‘수꼴’이다.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386 세대 아버지의 소위 진보적 세계관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을뿐더러 관심도 없고, 그냥 저냥 놀고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는 친구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병에 걸렸단다. 오래 못살 것 같은 낌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재산이 많다. 때마침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시골에 내려가 같이 살자고 한다. 주판알을 퉁겨 본다. 할아버지는 어차피 아버지와 의절한 상태이니 돌아가실 때까지만 모시면 그 모든 재산은 내 차지가 된다. 다만, 할아버지와의 농촌 생활을 견뎌야 하는 과정이 남았지만 말이다. 막상 시골에 내려가니 할아버지는 사당을 짓겠다고 자신을 노예처럼 부린다. 하루하루가 고역이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다시 젊어진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손자는 꾀를 낸다. 그리고 한 여자가 손자와 할아버지 사이에 불쑥 끼어든다.
영화 <죽지않아>는 기이한 삼각 관계를 기둥 줄거리로 삼은 영화다. ‘수꼴 할배 복상사 프로젝트‘라는 게 이 영화의 홍보 카피다. 그러니 대충이나마 그 삼각 관계의 정체를 가늠하실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를 하루 빨리 저 세상으로 보내고 싶은 야심(?)을 품은 ’개념 상실‘ 손자와 그의 의뢰를 받고 복상사 프로젝트에 우연히 끼어들게 된 정체 모를 여자, 그리고 죽기는커녕 점점 더 젊어지는 정력 충만 할아버지의 ’웃픈‘ 관계가 코믹하면서도 독특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이야기를 전진시킨다.
이 살벌하면서도 우스운 설정을 통해 <죽지않아>는 우리 시대의 세대 문제에 대한 한 편의 풍자극을 보여준다. 영화 속의 할아버지는 극단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가진 대한민국의 전쟁 세대, 혹은 노인 세대를 상징한다. 그리고 두 젊은이는 그 어떤 이념적 가치에도 무관심한 채 오로지 물질주의에만 함몰된 젊은 세대의 아이콘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들이 충돌하는 상황을 통해, 세대간의 간극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사회적 현실의 단면을 응축해서 담아낸다. 과연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죽지않아>를 연출한 황철민 감독은 일찍이 <프락치>라는 작품에서 작은 여관방이라는 협소한 공간 안에 감시자와 피감시자의 관계로 갇히게 된 두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권력과 폭력 앞에 무기력한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낸 바 있다. 최근작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에선 파업 현장에서 이탈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고뇌를 인간 관계의 권력학적 시선으로 풀어 헤쳤다.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성, 그리고 그 부조리성에 의해 왜곡된 인간성에 대한 그의 성찰적 주제 의식은 <죽지않아>에 이르러 형식 면에선 유연해짐과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더욱 직설적이 됐다.
황철민 감독은 영화 <죽지않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견고한 보수성을 스스로 진보를 칭하는 사람들은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영화는 그들이 웬만해선 죽지 않는, 엄청난 파워와 지구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말하는 영화다.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변화는 요원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죽지않아>는 어이 없어서 웃고, 민망해서 웃다 보면 묵직한 씁쓸함이 남는 영화다. 8월 8일 개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