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꼴라주가 다양성의 적이다

영화 이야기 2013. 7. 11. 22:26 Posted by cinemAgora

영화를, 혹은 범주를 더 넓혀 문화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 두 편의 특정 영화가 전국 스크린의 절반 이상을 꿀꺽하는 현상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문화라는 게 기본적으로 '다양성'의 기틀 위에 서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 획일성으로 흘러, 결국 문화적 수준이 떨어지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습니다. 게다가 영화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닙니다. 그건 시민의 영혼과 직결된 문화입니다. 따라서 더욱 적극적인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도 지당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주류 평론계에서는 참으로 이상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스크린 독과점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개별 영화에 대해선 침을 튀기며 칭송하거나, 혹은 누구도 못알아들을 난해한 어휘를 동원해가며 분석하는 데 너무 바쁜 나머지 문화적 환경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 어제 만난 한 영화과 교수는 꽤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제게 던져주더군요. 그는 "이른바 무비꼴라주인들이 독점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해 절대 강자의 심기를 거스를 말을 안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입니다. 무비꼴라주는 꽤 잘 나가는 평론가들을 모셔 놓고 관객과의 대화 행사를 빈번하게 엽니다. 그리고 그 무비 꼴라주는 국내 최대의 멀티플렉스인 CGV에서 운용하는 예술영화 전용관입니다. CGV는 국내 최대의 배급사 CJ의 계열사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밥줄이 달린 이슈에 대해 말을 아끼는 건 당연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전 "찍힌" 평론가라 그런지 무비꼴라주의 초청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뭐 물론 그 생색내기용 게토에서 절 부른다 한들 안갑니다.)

이건 비단 평단의 문제에 국한된 건 아닐 겁니다. 대형 배급사와 미필적 공생 관계에 있는 유력 제작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선 여전히 미온적입니다. 슈퍼갑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찍혀서 투자라도 받지 못하게 되면 큰일 날 일이지요. 이렇게 해서 제가 밑에 첨부한 <명왕성>의 사례처럼, 스크린 독과점의 희생양이 된 작은 영화들의 신음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릴 뿐입니다. 

오늘 마지막 장을 덮은 장하준 교수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는 규제를 혐오하는 자유 시장주의자들이 결국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만든 사례를 여러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시장은 인간의 제한적 합리성에 의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적절한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정책적 개입이 사실상 가장 필요한 부분이 문화 분야입니다. 그런데도 규제라는 말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대기업이나, 그 대기업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혹은 무관심으로 대응하는 이들이 있는 한, 한국의 영화 다양성은 언제까지나 무비꼴라주라는 골방에 갇힌 채 자족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대기업의 배급력에 힘입어 스크린을 독식한 영화 제작자들은 돈을 벌 것이고, 기껏 골방에 불려가는 평론가들은 행사료를 챙기겠지만요.




영화 <명왕성> 스크린 편성에 대한 제작사의 입장

영화 <명왕성>이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 주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바로 ‘1:99의 싸움’입니다. 영화 속 준은 명문사립고에 전학을 가서 그곳에서 입시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준이 살고 있는 세계는 오직 1등만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비단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밖, 현실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영화 <명왕성>은 현재 극장가에서 상영되고 있는 블록버스터 외화와 대작 한국 영화들에 밀려, 제대로 된 상영회차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관객들을 만나보기도 전에 자동 폐기 처분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명왕성>은 이미 영등위로부터 “일부 장면에서 폭력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모방위험의 우려가 있는 장면 묘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후 사회 각계 각층의 항변과 제작사의 소명서를 통해 재분류로 15세 이상 관람가로 수정될 수 있었지만, 이미 영화 개봉을 준비하는데 있어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명왕성>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약 80 여개의 스크린을 통해 7월 11일 개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블록버스터 외화와 대작 한국영화에게만 좋은 상영시간을 몰아주는 극장들의 관행에 의해 관객들에게 제대로 선택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에든버러 국제영화제, 피렌체 한국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먼저 상영되어 인정받고 호평을 받았지만, 정작 국내 관객은 제대로 된 극장에서 만나볼 수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80여개가 넘는 스크린 수를 확보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관람이 용이하지 않는 아침과 밤 시간대에 몰린 편성은 영화를 상영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2013년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수상한 <명왕성>이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제대로 평가 받을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한국 영화산업의 현주소에 말문이 막히며 “개천에서 용이 날수 없다.”는 이야기가 교육만이 아닌 사회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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