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대중을 만든다

영화 이야기 2013. 6. 9. 13:17 Posted by cinemAgora

작품성과 입소문을 압도하는 수(數)의 영화 흥행 법칙: 다수 팬심에 의해 예매율이 높아진다-->극장들이 너도 나도 상영관을 배정한다-->극장에 가도 그 영화 빼곤 볼 게 없게 만든다-->흥행 스코어가 올라간다-->따 당하지 않으려면 보게 만든다.(한국 관객들은 혼자만 뒤쳐지는 걸 매우 두려워 한다.) 

전제 조건: 1, "낚였다"고 후회할지언정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영화 관람료가 싸야 한다. 
2. 관객들이 자신의 실망을 "네티즌 평점"이라는 배설구를 통해 해소함으로써 잘못됐던 기대에 대해 심리적으로 보상받을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한국영화의 흥행 사례는 너무나 다양한 모델이 있기 때문에 그걸 통계화하거나 경험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가 매우 힘들다. 분명한 건, 영화 흥행은 사회적 분위기와 조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도, 딱히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다만, "그럴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광해: 왕이 된 남자>와 <7번방의 선물>은 대선이라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전후한 사회 분위기의 후광 효과를 입어 대규모 흥행에 성공한 사례라고, 나는 본다. 하지만 누군가 "꼭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반론의 여지도 크지 않은 게 사실이다. 

나는 십수년간 한국의 박스오피스 추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어떤 뚜렷한 법칙성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충무로에선 "영화 흥행은 하늘도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무법칙의 법칙에서 딱 한가지 예외가 있긴 하다. 그건 다수의 스크린을 확보한 영화가 다수의 관객을 포획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급력이 가장 큰 변인이다. 즉 환경적 요인이 작품성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영화 환경은, 제작사의 자기 자본 능력이 현저히 약화된 대신, 메이저 배급사로의 자본 집중 현상(돈 뿐만 아니라 인력까지도!)이 가속화되는 방향성을 갖고 변화해 왔다. 메이저들에겐 다행이게도, 그걸 견제하려는 그 어떤 정책적 개입도 없었기에 수직계열화된 배급사들은 거의 무한대의 영업의 자유를 누리며 이른바 4강(CJ, 롯데, 쇼박스, NEW)의 과점적 체제를 형성했다. 

이 과점적 체제는 비교적 쉽게 관객들을 포획할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는 점을 의미한다. 설령 개별 작품들의 흥행 희비는 엇갈리더라도 '라인업'을 앞세워 와이드 스크린 배급 전략을 손쉽게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총량적인 투자 리스크는 줄어든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첫번째 부작용은 다수의 제작사들이 이 과점 체제의 하청업체들로 사실상 전락했다는 것이다. 지금 대형 배급사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게 자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제작사는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사실상 슈퍼갑들인 메이저 배급사들은 기획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공동 제작의 명분을 내걸어 6: 4의 관행적 수익배분율을 8: 2까지 높이고 있다. 사정이 이럴지언정, 시드 머니가 없는 다수의 제작사들은 이들 배급사에 줄을 대는 것만으로도 황공한 지경이 됐다. 

이런 환경이 낳은 파생적 부작용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기획 영화가 통계적으로 흥행 타율이 높은 내러티브에만 함몰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모니터링 제도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기획,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모니터링을 거치고, 점수가 높은 영화에 한해서만 투자의 기회가 돌아간다. 그러나 꼭 모니터링 점수가 높다고 흥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평행이론> 같은 경우, CJ의 모니터링에서 역대 최고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배급사들이 통계와 데이터를 들이대는 이유는, 겉으로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라지만, 실은 이유가 따로 있다. 대규모 조직의 특성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 책임을 회피할 근거를 갖고 싶은 것이다. 

영화 비즈니스는, 다른 제조업처럼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산업 분야가 아니다. 수요가 공급을 만든다는 건, 사실상 후기 자본주의에선 무효한 말이 된 지 오래다. 즉 이미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 새로운 상품이, 없었던 소비자의 필요를 만드는 것이다. 영화는 산업이 된 초창기부터 그랬다. 창작자들의 크리에이티브가 동시대의 무의식과 접점을 만들어내는, 지극히 공급 편향적 산업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한 영화 산업을 둘러싼 환경적 변수들은 관객들, 더 나아가 대중의 문화적 취향을 상당 부분 결정한다. 투자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영화를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그러니까 '독해가 아주 쉬운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수준'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지만 굳이 쓰자면, 높은 수준의 영화로 대중을 고양시키는 게 아니라, 낮은 수준의 영화로 대중에 영합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 그러니까 낮은 수준의 영화와 대중의 상호 작용이 되풀이될수록, 영화와 관련한 문화 수준은 하향 평준화된다. 당장 많은 영화 전문지들이 폐간하고 비평으로 대표되는 영화 담론이 껍데기만 남게 된 것도 그런 현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디 워> <7번방의 선물>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의 기이한 흥행 현상도 마찬가지 증후로 읽힌다.

창작자들은 메이저 배급사들의 피고용인이 돼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데이터를 주입 받으며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관객들은 창작자들이 하고 싶지도 않은, 그러니까 애초에 진정성도 없는 이야기를 즐기며 여운 없는 이미지의 향연을 그저 소비한다. 이게 내가 진단하는 2013년의 한국 영화 풍경이다. 

대중 문화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아주 전투적인 극소수 뱅가드를 제외하고,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서 향유된다. 그것이 고품격이든 저질이든. 앞서 말했듯, 대중에게 어떤 상황을 던져 줄 것이냐는 그러므로 온전히 창작 사이드의 고민으로 남는다. 그리고 생각이 있는 창작자라면, 그저 살아 남기 위해 메이저에 줄을 대려는 노력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더 많은 관객들이 경청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들의 노력을 응원하고, 끊임 없이 문제점을 상기시키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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