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스트의 고민은 그가 가진 카메라의 시선과 피사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일 것이다. 그들의 고민을 바라보고 평론하는 입장으로서의 내 고민은, 다큐멘터리스트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 사이에서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이냐다.
오늘 기술시사 겸 심포지엄을 계기로 <시바, 인생을 던져>이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스트 이성규 감독이 찍은 극영화다. 인도에서 찍었다. 영화는 인도 여행 다큐를 찍으러 온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캐릭터를 빌어, 대상과의 거리 설정에 대한 감독의 딜레마를 극화한다. 고로 이 이 영화는 인도가 배경일 뿐, 인도를 이해하려 하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의 고뇌의 기록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영화는 형식적으로 기묘한 지점에 놓여 있다. 반은 극영화이고 반은 다큐에 가깝다. 그러니까 배우들은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를 하고, 배경이 되는 인도의 모습은 일부를 빼고는 많은 부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촬영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두 영화가 떠올랐다. 하나는 최초의 다큐멘터리라고 불리는 로버트 플래허티의 <북극의 나눅>(1922)이었고, 하나는 소비에트 다큐멘터리의 선구자인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였다.
<북극의 나눅>은 극지방에 거주하는 이누이트족의 일상을 서구인의 시선으로 담은 작품이다. 그의 시선에 나눅으로 상징되는 이누이트족의 생활은 척박하면서도 이국적이다. 이 이국성의 기록, 또는 민속지학적 기록에 대한 욕망, 다른 측면에서 인류학자 레나토 로살도가 지적한 바, "제국주의적 노스탤지아"야말로 초기 다큐멘터리의 원동력이었다.
한편,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쇼트들을 의도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영화가 영화에 불과하다는, 그러니까 창작의 주체가 담아낸 프레임 안의 해석에 불과함을 관객들에게 알린다. 이것은 다큐멘터리 학자 빌 니콜스가 이른바 "성찰적 다큐멘터리 양식"으로 분류한 원형적 시도였다.
<시바, 인생을 던져>에서 인도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북국의 나눅>이 그랬든 일면은 민속지학적이되,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오리엔탈리즘적이고 제국주의적 노스탤지아에서 자유롭지 않되, 그 시선에 대한 객관화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성찰성을 닮았다.
이성규 감독은, 이 시도를 "탈매트릭스 시네마"라고 호명했다. 그 개념 안에서의 매트릭스가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허구의 극단(또는 판타지)으로써의 영화를 총칭한다면, 그는 다큐멘터리스트의 방식과 관점에서 접근한 극영화 실험을 일컫는 말로 이 말을 쓴 듯 하다. 다분히 작위적인 작명이다. 심지어 자위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작위적이고도 나르시즘적 작명에는 작위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영화의 한계에 대한 고백이 들어 있다. 다큐멘터리조차 또 하나의 매트릭스일 수밖에 없는, 그 한계 속에서 꿈틀대는 창작자의 자기 학대, 또는 자기 위안이 담겨 있다. 그 모순을 인식하고 고민한다는 것. 그것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요즘은 많은 창작자들이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