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사회' 개인의 절망을 외면하는.

영화 이야기 2013. 4. 18. 20:16 Posted by cinemAgora



아동 성범죄를 소재로 삼은 한국영화들이 최근 잇따라 나오고 있는 것은, 물론 점점 더 흉악해지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영화들이 천착하는 지점은, 아동 성범죄의 끔찍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같은 범죄를 막지 못하는 이 사회와 공권력의 무기력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광주 인화학교의 천인공노할 장애 아동 성범죄를 다룬 <도가니>는, 가해자들에게 법의 엄중함이 적용되지 않은 현실을 고발한다. 지난해 개봉한 <돈 크라이 마미> 역시 딸을 성폭행한 범인에게 사적 복수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모성의 살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이웃사람>의 여주인공은 희생양이 된 딸에 이은 두 번째 소녀 살인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들 영화에서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공권력은 모두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고, 이 사회의 공기는 너무 태연하거나, 혹은 그래서 더욱 공포스럽다.


그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 영화 <공정사회>는 반어법적인 제목 그대로, 이 시대의 공정이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더욱 직설적으로 캐묻는다. 이 영화도 아동 성폭행이 일어나고, 어머니의 사적 복수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최근 이어진 한국영화의 소재적 접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 영화가 특별한 부분은,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해 놓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는 오히려 이야기의 절정부에 해당하는 장면부터 보여주는데, 그 뒤로도 감독은 사건의 진행과 추적의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뒤섞어 놓음으로써 관객들이 이야기의 순차적 흐름에 편안하게 몸을 맡기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스토리가 아닌 정서, 스릴이 아닌 주인공의 막막한 답답함, 기댈 곳 없는 좌절과 절망의 심경을 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비록 전형적인 편집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편집을 통해 연출의 의도는 더욱 효과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내가 파악한 감독의 의도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개인의 절박함과 절차를 내세우는 형식적 공정성의 충돌이다. 여주인공이 딸의 성폭행범을 집요하게 추적하게 만드는 동인은, 결국 그 절차적 공정성의 느려 터지고 무심한 행태이다. 그럼에도 경찰은, 여주인공이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며 되레 윽박지른다. 결국 주인공이 사적 복수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게끔 밀어 붙이는, 어쩌면 누군가의 심상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들고 있는 진짜 범인은 따로 있는 게 아니냐는, 슬픈 현실 인식이 이 영화에는 깔려 있다.


영화 속에서 장영남이 연기한 여주인공은 단 한번도 그 이름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모두들 그녀를 “아줌마(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Azooma'이다.)”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이 영화 속의 아줌마라는 호칭은,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억척스러움’을 상징하는 기표로 활용되긴 하지만, 오히려 개인을 익명성의 굴레에 가두는 시스템이 개인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있는지를 상징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개인의 절박함을 증발시키는 익명성. 누구든지 어떤 절박한 사연을 가졌든간에 ‘the one’이 아닌 "one of them"으로 대접받을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관료성, 그리하여 결코 공정하지 않은, 껍데기 뿐인 공정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후반부의 사적 복수 장면은 일부 관객들에게 지나치게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주인공의 절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치라고 본다면, 영화의 남다른 면모가 훼손됐다고 판단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공정 사회>는 스릴러나 미스터리 등의 장르적 틀로 파악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영화 속에서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짜릿함을 기대한다면 번짓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공정 사회>는 관객들에게 막막함을 안겨주려고 노력하는 영화다. 그리고 당신이 가슴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을 안고 극장문을 나서게 된다면,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영남이라는 배우의 재발견은 덤이다. 4월 18일 개봉. 


2013. 4.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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