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가슴 벅찬 걸작

영화 이야기 2013. 3. 18. 09:26 Posted by cinemAgora



영화 리뷰를 쓰기 전에 이렇게 떨려 보기도 처음이다. 고백컨대,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아주 많이 긴장돼 있다. 내가 과연 어떤 언어로 이 영화를 논할 수 있을 것인지 두려움이 앞선다.


오늘 아주 슬픈 영화를 보았다. 슬픔으로 가슴이 꽉 틀어 막혔다. 그러나 그 슬픔은 아름다웠다. 아니 영화가 담고 있는 슬픔이 너무 처연하게 아름답기에, 나는 아름다운 슬픔을 울었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상통하는 장면 앞에 넋이 나갔다. 혼이 빠졌다. 잔혹한 역사의 한 국면을 재연하지만, 더 없이 고혹적인 시 한 편을 보았다. 그렇다. 이 영화는 차라리 시였다. 바람소리조차 없는 어스름 저녁에 치르는 고요한 제사였다. 1948년, 이유도 모른 채 저 제주도에서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죽어간 3만 명의 영혼에 보내는 씻김굿이었다.


오멸 감독의 <지슬>을 소개하기 위해 제주 4.3 사건에 대한 역사적 팩트들을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역사를 바로 알라고 요구하기보다 슬픈 역사를 슬픔 그대로 느끼라고, 그 잔인한 현장이, 그 인면수심의 현장이, 그 언어도단의 현장이 지금의 우리에게 남기는 게 무엇인지 가늠해보라고, 그 때의 그 피 비린내 나는 공기를 한번 맡아보라고 말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슬>이 핏빛으로 가득찰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멸 감독의 천재적 연출은, 시적이면서도 세밀한 화면으로 단지 냄새, 그 학살의 냄새를 전한다. 이데올로기 갈등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양민들의 어리숙하고도 어리둥절한 공포를 전한다. 광기를 지니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던 군인들의 고뇌를 전한다.




여전히 내 언어의 한계를 느끼는 와중에, <지슬>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장면을 소개하기로 하자. 하나는 군인들의 “초토화 작전”을 피해 동굴에 숨어 들어간 양민들이 나누는 일상의 대화를 묘사하는 장면이다. 도무지 이 학살의 배경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양민들은, 저녁 마실 나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듯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한 대화들을 나눈다. 언제 불현듯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절대 공포를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다. 같이 피난 온 이웃집 총각에게 “발정난 놈“이라고 흉보며 키득댈 정도로 오히려 태평해 보인다. 그래서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왜 동굴 속으로 쫓겨 들어왔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살기 위해,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숨어 들어 왔으므로, 일단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긴 하되, 설마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은, 당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제주의 양민들이 도대체 왜 죽어야 했는지에 대해 넌지시 반문한다. 이토록 순박한 사람들이, 왜 순식간에 빨갱이로 몰려 초토화 작전의 사냥감이 됐는지를 묻는다.



이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게 한 민가에 침투한 군인들의 학살 신이다. 앞의 장면이 제주도 방언을 구사하는(그래서 이 영화는 대사 전체에 한국어 자막이 붙어 있다.) 인물들의 대사를 매우 사실주의적으로 담아낸다면, 학살 장면은 슬로우 모션의 롱테이크로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안겨준다. 카메라가 마당에서 뒤뜰로, 다시 방안으로 슬쩍 옮겨 갈 때, 거기에는 도륙 당하는 사냥감이 되어 버린 양민들과, 희번덕거리는 광기로 가득찬 군인들의 모습이 차례로 스친다. 그 잔혹한 현장을 마치 유영하듯 훑고 지나가던 카메라는 고개를 떨군 채 마당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한 신병의 앞에서야 멈춘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학살의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위안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준다.


학살 장면을 오히려 시적인 서정성에 담아 표현하는 오멸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려는 진정성의 정체와 맞닿아 있다고 본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의 영화가 역사적 실체에 다가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수밖에 없다는 듯, 잔혹한 슬픔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내면서, 그 잔혹함의 정서를 가장 효과적으로 퍼올리는 <지슬>은 지독히도 변증법적인 미학을 성취한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말한다. 이 영화는 200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담은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걸작이라고. 오멸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스탭들에게 경의를 보낸다. 


2013, 3.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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