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과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나는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강박적 집착과,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내 경우, 사람들이 “다르다”를 “틀리다”라고 얘기하는 걸 못참는다. 그 자리에서 그걸 수정해주고 있자면, 내가 이 사람에게 참 깐깐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어쩔 수가 없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트라우마는 여전히 날 괴롭힌다. 그 순간부터 나는 언제나 “나쁜 녀석”이라는 자기 학대 심리에 시달리고 있다.


바쁜 일상과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도피하게끔 도와주지만, 도움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증상이 심해지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강박과 트라우마로 인한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돌출적인 행동을 하게 돼 스스로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관계들조차 파괴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두 주인공이 그런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아내의 외도 장면을 목격한 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돼 8개월의 병원 생활을 막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나이 팻(브래들리 쿠퍼 분). 또 한 사람은 남편의 죽음 이후에 찾아온 극도의 외로움 때문에 아무 남자와 마구 자고 돌아다니는 ‘헤픈’ 여자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공통점은 둘다 감정이 폭발하면 물불 안가린다는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이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되지만, 감정적 교류는 쉽지 않다. 팻은 아내가 꼭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고, 티파니는 그런 팻의 주위를 맴돌 뿐이다. 팻으로선 아내를 기다리는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티파니가 그저 괴팍한 여자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티파니는 팻에게 댄스 경연대회에 함께 참석하자고 제안한다.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은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티격태격’에서 ‘알콩달콩’의 사이로 발전한다는 로맨틱 코미디 공식에 충실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남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두 남녀의 캐릭터 때문이다. 팻과 티파니 모두 극단적인 성격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외로움을 지니고 누군가의 위안을 필요로 하는, 그냥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이들이 보이는 모습은 언제가 우리가 보였던 모습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보였을 수도 있으나 환경적 억압 기제 때문에 꾹 눌러둔 무엇인가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자신들의 기분과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데 솔직하다. 이 독특한 두 남녀는, 비록 마음의 병을 지녔지만,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묘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극 속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분한 팻의 아버지는,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아들과 겉으로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 그가 실은 종이 한장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불법 스포츠 도박에 빠져든 아버지는, 아들과 풋볼 중계를 같이 봐야 이긴다는 근거 없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어렵사리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을 찾아나가고 있는 아들을 불러 세워 놓고 “제발 풋볼 중계를 같이 보자”고 애원한다. 로버트 드니로의 존재는, 팻과 티파니, 그리고 관객인 우리 사이의 매개와도 같다. 즉 그를 통해 우리는 팻과 티파니가 단순한 이상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이면일 수도 있다는 보편성을 공유하게 되며, 그들의 내면적 성장과 화해의 드라마에 흔쾌히 감정이입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상처 받은 모든 영혼에 보내는 토닥임과도 같다.


영화의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력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티파니 역의 제니퍼 로렌스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녀는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주연상을 비롯, 총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도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웅변한다. 신선하게 빤하면서, 빤하지 않은 감동을 안겨주는 이 영화는 크리스찬 베일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해준 <파이터>의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이 연출했다.


2013. 2.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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