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 분노를 넘은 슬픔

영화 이야기 2012. 11. 19. 08:01 Posted by cinemAgora

 

찰스 다윈은 그의 저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 대하여>에서 인간의 기본 감정을 6가지로 분류했다. 행복, 슬픔, 공포, 혐오, 놀람, 분노 등이 그것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감정도 이 여섯 가지에 해당한다. 관객들은 코미디나 휴먼 드라마를 보며 슬픔, 또는 행복을 느끼고, 호러 영화를 통해 공포와 혐오를 느끼며, 스릴러의 반전을 통해 놀람을 느낀다. 그런데 여섯 가지 감정 가운데 유독 분노를 안겨주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영화가 기대에 훨씬 못미쳤을 때를 제외하고, 영화 자체의 이야기가 관객들의 분노를 야기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영화들이 관객이 추구하는 감정을 앞의 다섯 가지에 국한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한국영화에 ‘분노’가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도가니>는 그 전조가 됐다.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을 매우 불편해 하면서도 공분을 느끼며 극장문을 나왔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느낀 분노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가”라는 탄식을 넘어,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른 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이 가해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사회의 정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분노였고, 그것은 영화를 뛰어 넘는 사회적 신드롬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올초 논란 속에 300만 관객을 동원한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주는 감정 역시 행복이나 슬픔, 놀람이나 공포 보다 분노에 가깝다. 법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대원칙이 붕괴되는 현장을, 영화적 재연이긴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더욱 생생한, 그러나 슬그머니 잊혀지고 만 상황을 <부러진 화살>은 소환했고, 관객들은 분노했다. <도가니>와 마찬가지로 <부러진 화살> 역시 정의롭지 못한 정의, 껍데기만 남은 사법 시스템의 특권 의식에 대해 이 시대의 관객들이 상당한 실망감을 안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나는 두 영화의 흥행이, 관객들이 느끼는 시대의 공기에 대한 무의식과 작품이 의식적으로 조우한 결과라고 본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선보이며 또 한번의 센세이션을 예고하고 있는 <남영동 1985>는, 정지영 감독이 <부러진 화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강력한 분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분노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글로는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과 슬픔이 몰려 온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는데, 객석 곳곳에서 흐느낌 소리가 울려 펴졌다. 분노를 넘은 슬픔. 그게 이 영화가 관객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감정이다.

 

<부러진 화살>이 사법 시스템의 틀 안에서 벌어진 근 과거의 부조리를 담고 있다면, <남영동 1985>는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의 태반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전두환 독재 정권 치하의 불법적 인권 유린을 담고 있다. 1985년 남영동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영화는 이미 작고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자, 당시 민청학련 의장직을 지냈던 고 김근태 씨가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 끌려가 당했던 20여일간의 고초를 다룬다. 법을 집행해야 하는 경관들은, 법이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고 김근태 씨(박원상 씨가 연기한 이 인물은 영화 속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를 갖은 방식으로 고문한다. 물 고문, 고춧가루 고문, 전기 고문 등 인간이 한 인간을 극단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해 고안한 온갖 방식이 동원된다. 이들이 고문을 가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어떻게 해서든 그와, 연루된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그들은, 고 김근태 고문으로부터 진실이 아닌 자백, 즉 가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간첩단 조작, 이것은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권력 자체에 정당성이 없는 군부 독재 정권이 국민들에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 써 먹은 방식이기도 하다.

 

<남영동 1985>에 대해선 이 쯤에서 말을 아끼는 게 좋겠다.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심상을 얻을지는 관객 각자가 알아서 할 부분이다. 다만, 정지영 감독이 왜 하필 이 시점에서 1985년의 남영동에 주목했는지는 새겨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악한 과거는 잊는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다. 그런 과거일수록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이 땅에서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남영동 1985>가 누군가에게는 다소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똑바로 응시하시라. 그러면 더 없이 먹먹한 가슴 한 켠에 무언가를 안고 극장문을 나서실 수 있을 것이다. <남영동 1985>는 그런 관객들이 이 세상에 좀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영화다. 11월 2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2012. 11.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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