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안' 약속의 땅은 어디인가

영화 이야기 2012. 10. 18. 09:56 Posted by cinemAgora

 

 

영화 <하나안>을 좀더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인’에 대한 사전 학습이 필요하다. 두산 백과에 따르면, 고려인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구 소련 붕괴 이후의 중앙 아시아 지역 독립 국가 연합에 살고 있는 한인 교포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한국인들은 1863년부터 러시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두만강 너머 연해주 지역에 정착했다. 그러나 소련 정권 성립 이후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이 때 고려인 수는 17만 5천여 명. 현재는 53만 명 정도의 고려인들이 중앙 아시아 지역에 분포돼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고려인’에 대한 이같은 장황한 설명을 먼저 늘어 놓는 것은, 이 영화의 박 루슬란 감독이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4세이기도 하거니와 영화의 주인공인 스타쓰 역시 고려인 4세이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에서든 소수민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많은 나라에서 고려인들이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의해 직장에서 쫓겨난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고 한다.

 

영화 <하나안>의 감독 박 루슬란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안에는, 그러한 고려인의 역사와 처지가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정체성은,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또 다른 고려인 스타니슬라브 장을 통해 영화에 투영된다. 그것을 최대한 단순화해 말해 본다면, 나는 ‘부유성’이라고 부르겠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어 떠서 다닐 수밖에 없는 부유성, 박 루슬란 감독에게 그것은 중앙 아시아 한인들의 현재이다. 그러나 <하나안>이 영화적 힘을 갖는 이유를 단순히 고려인의 특수한 처지에 기인했기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 부유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현대 사회에 속한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영화는 보편적 울림을 획득한다.

 

영화 <하나안>은 아마추어 배우로서 영화 속에서 바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연기한 스타니브슬라브 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박 우슬란은, 이 인물이 겪어온 역정을 그대로 영화로 재연하기로 하고, 실제 인물이 바로 자기 자신을 연기하도록 하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주인공 스타쓰는 같은 고려인 친구 뿐만 아니라 우즈베니스탄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한 친구를 잃게 되는 슬픔을 맞는다. 친구들 가운데 고려인 친구 신(감독 박 루슬란이 직접 연기했다)은 한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또 한 명의 친구 사이드는 마약에 중독돼 결국 달콤한 죽음을 맞는다. 경찰을 꿈꿨던 스타쓰는, 마침내 경찰이 됐지만 경찰 조직 내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사표를 던진다. 절망의 나락에서 그는 마약에 손을 댔다가 중독자가 돼 버리고 만다. 이런 와중에서 한국에 유학 갔던 신이 “한국이 약속의 땅”이라며 한국으로 건너 오라고 그에게 손을 내민다. 스타쓰는 한국에서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영화 제목 ‘하나안(HANAAN)‘은 기독교에서 약속의 땅을 일컫는 ’가나안‘의 러시아식 표현이다. 영화 제목 그대로, 스타쓰는 황량한 우주베키스탄의 타슈겐트에서 친구들을 잃고, 스스로도 길을 잃지만, 끊임없이 약속의 땅을 찾아 배회한다. 처음에 그에게 경찰이라는 직업이 약속의 땅이었고, 나중엔 마약이 일시적이나마 약속의 땅이 됐다. 그리곤 마지막엔 한국이 약속의 땅이 된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스타쓰에게 결국 약속의 땅은 없다. 어쩌면 그는 이 지옥에서 저 지옥을 오갈 뿐이다. 그건 고려인 4세 스타쓰의 운명이기도 하거니와, 우리들 자신의 보편적 조건일 수도 있다.

 

희망은 극단의 절망 속에서 비로소 꽃을 피운다고 했던가. 삶을 견디는 힘은, 끊임 없이 희망을 주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척박한 곳인가를 직시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면서 했다.

 

2012. 10.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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