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터', 마주치면서도 엇갈리는

영화 이야기 2012. 8. 13. 06:35 Posted by cinemAgora

 

 

가끔, 나는 가족이 우리의 삶에 그토록 소중한 존재인가 생각할 때가 있다. 나를 포함해 주변을 바라봐도, 단란하고 행복하기보다는 지지고 볶는 게 일상인 가족들이 더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 때문에 징글징글하다”는 표현은 직장 동료에겐 안 해도 식구들에겐 곧잘 한다. 친구들과는 잘 지내도 형제들끼리 낯을 붉히고 다툴 때가 많다. 회사 상사의 질책 한마디에는 머리를 조아려도 아버지 어머니의 잔소리에는 짜증이 난다.

 

수험생이라도 있는 집안이라면, 가족 내 권력 관계는 수험생을 중심으로 일사 분란하게 재편된다. 이런 집은 온 가족이 입시 전선을 향해 총진군하는 하나의 전투 분대를 방불케 하는데, 대개 어머니가 분대장을 맡을 때가 많다. 분란이 있는 집은 십중팔구 돈 때문이다. 없으면 없어서 다투고, 있으면 있어서 사이가 틀어진다. 어쨌든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 현실 속의 가족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 없다.

 

현실이 이럴진대 영화 속의 가족이 행복 단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그거야말로 설득력 제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가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도 많지 않다. <가문의 영광>의 방식이라면 모를까, 평단으로부터 좋은 영화라는 칭찬을 들을지언정 흥행은 보장 받지 못하기 십상이다. 영화에서조차 현실을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는 판타지 지향형 관객들의 비중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와 스위스 국적을 가진 여성 감독 위르실라 메이에의 영화 <시스터>도 아마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가족 휴먼 드라마를 기대한 관객들에겐 적절한 작품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냉혹한 현실에 내쳐진 한 가족, 표면상으로는 부모 없는 남매, 즉 철없는 누나와 너무 일찍 생활 전선에 내동댕이쳐진 12살 동생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년 시몽은 알프스 자락의 스키장에서 스키 도구를 훔쳐다 내다 파는 일로 돈을 모은다. 이 소년 절도범은, 툭하면 일을 그만두는 누나 루이를 부양한다. 그러니까 이 집안은 반대다. 누나가 절도범 동생에게 용돈을 타가는, 괴이한 집안이다. 시몽은 부모님이 어렸을 때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밀은 따로 있다.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관객들은 이 어처구니 없는 가족 관계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슬쩍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영화는, 시종 시몽과 루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가운데, 모성에 대한 진한 결핍감을 가진 시몽의 외로움도 함께 포착한다. 그래서 그는 스키장에서 만난 한 중년 여성에게 어머니를 느끼려고 한다. 자신의 삶이 한심한 루이는 그런 시몽을 넉넉히 품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오히려 루이 때문에 막 진행되고 있는 자신의 연애가 방해 받을 까봐 전전긍긍한다. 소년은 너무 어른스럽고, 누나는 너무 개념이 없다.

 

그럼에도 함께 삶을 일굴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이 혈연이라는 끈으로 강하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끔찍해하면서도 종국엔 서로를 찾을 수밖에 없는, 엇갈리면서도 서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게도 이들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영화 <시스터>는 조금은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남매의 이야기를 통해 그렇게 겉으로는 냉랭하지만 속으로는 살가운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한 화법으로 풀어 낸다. 여기에는 관객들의 감동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 어떤 관습적인 장치가 없다. 스키 시즌이 끝나고 쓸쓸하게 남아 있는 리프트처럼, 그렇게 시끌벅적한 세상에 홀로 남아 있는 이 가족이 끝내 어떤 희망을 찾아낼 수 있을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집을 나와 리조트에서 밤을 지샌 시몽은 케이블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순간, 자신을 찾기 위해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가고 있는 누나와 엇갈린다. 마주치면서 엇갈리는 이 장면이야 말로 현대 가족의 어떤 단면을 더 없이 강렬하게 드러내 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12살 소년 시몽을 연기한 케이시 모텟 클레인의 천재적인 연기력에 혀를 내두를 관객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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