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나이트>의 조커는 배트맨, 또는 브루스 웨인의 얼터 에고였다. 그 얼터 에고의 마성에 얼마나 푹 빠져 버렸는지, 적지 않은 관객들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고 나오면서 시리즈의 대단원을 장식하기엔 베인이 너무 약하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그가 벌이는 악행의 스케일은 조커에 비해 훨씬 더 커졌는데도 말이다. 요컨대, 관객들이 조커처럼 매력적인 악당에게 빙의되고 싶어 하게 만든 게 <다크 나이트>의 성과이자 부담이었다.
그러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결국 배트맨이라는 주체, 즉 조커와 투페이스가 돼 버린 하비 덴트라는 타자를 통해 다시 브루스 웨인이라는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시리즈의 종착역에 도달했기에, 배트맨은 끝내 딜레마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은 언제까지 박쥐 탈을 뒤집어 쓰고 야경단원 행세를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시민의 주체성, 또는 시스템의 자정적 정의 수호 능력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 <다크 나이트>에서 확인한 바대로 배트맨의 그 순진무구한 시도는 조커에 의해 처절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중요한 것은 조커에 이은 또 한 명의 타자, 즉 베인의 상징성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 그가 벌이는 악행의 상징성이다. 베인은 배트맨을 지하 감옥에 가둬 버린다. 그의 적이 그랬듯, 그도 그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담시는 베인에 의해 초토화된다. 베인은 이런 식으로 부모가 살해 당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던 브루스 웨인의 트라우마를 비웃는다.
어쨌든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의 최고 재벌이며 자본가이다. 그가 수호하는 정의란, 어쩌면, 자본가의 정의다. 베인은 그것을 일깨운다. 그가 베인과 같은 위치에서 싸우기 위해선, 베인이 겪어야 했던, 그러니까 지하 감옥을 탈출하듯,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올라서야 한다. 이것은 브루스 웨인이 가진 계급적 한계에 대한 베인의 가르침이다. 게다가 베인은 브루스 웨인이 개발했던 무기들을 역으로 이용한다. 핵무기는 사실상 베인의 것이 아니라, 배트맨의 것이다. 즉 고담시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전편에서도 그랬듯, 조커나 베인이 아니라, 정의를 자처하는 배트맨이라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배트맨을 통해 미국의 현재를 투영하고 있다고 봤다. 이 시리즈는 인간이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배트맨도 예외가 아니라는, 어쭙잖은 통찰의 산물이 아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이르러 스스로 폭력을 배태하고 그 부메랑을 맞고 있는 미국에 대한 성찰이 배트맨과 베인의 대결을 통해 가장 드라마틱하게 상징화된다. 그런 성찰을 얹기에 배트맨은 더 없이 안성맞춤의 슈퍼 히어로였고, 배트맨을 새롭게 재해석하기에 크리스토퍼 놀란은 더 없이 적절한 감독이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 시리즈의 종착역으로 손색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