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영화 이야기 2012. 7. 17. 10:14 Posted by cinemAgora

 

 

누가 로맨스를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했던가. 하물며 2차 성징이 오기 훨씬 전의 유치원생에게도 로맨스는 있다. 동네 경로당에는 간혹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삼각 관계 갈등이 빚어지곤 한다. 경향적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할아버지들 품귀 현상 때문에, 심지어 할머니들이 '머리 끄댕이' 싸움까지 벌이는 지경까지 벌어진다고 하니, 아마도 로맨스는 인간이 평생 동안 꿈꾸는 무언가가 아닐까 싶다. 어리나 늙으나, 인간은 살아 있는 이상, 사랑을 꿈꾼다. 로맨스에 설레고 싶어 한다.

 

영화도 이걸 잘 안다. 이제 10대나 20대들은 더이상 로맨스 영화의 단골 주역이 아니다. 최근작 <건축학 개론>은 90년대 대학 1학년생들이 풋풋하고 설레는 첫 사랑의 이야기를 펼치지만, 사실 이들은 이제 30대가 된 주인공들의 추억으로 소환될 뿐이다. 임수정이 주연으로 나온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아예 30대 부부를 로맨스 해프닝의 중심에 놓는다. 더 나가면 지난해 봄 정중동의 흥행을 기록한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작품이 있다. 황혼의 두 커플이 나누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젊은이들 뿐 아니라 부모 세대를 함께 울렸다. 외국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로맨스의 주역들이 점점 나이가 먹고 있다. 틸다 스윈튼이 주연한 <아이 앰 러브>는, 남부러울 것 없는 상류층의 중년 여성이 하필이면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피파리의 특별한 로맨스>도 중년의 사랑이 기둥 줄거리다.

 

지난 12일 개봉한 영국 영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은 아예 말년의 노인들이 주인공이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무려 일곱 명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실버판 <러브 액츄얼리>'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사연이 중첩된다는 점에서 <러브 액츄얼리>의 구성을 닮았지만, 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러브 액츄얼리>와 다르다. 배경은 인도의 한 호텔이다. 영화 제목 그대로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여기서 '엑조틱'은 영어로 exotic. 발음 기호대로 한다면 '이그자틱'이라고 표기하는 게 맞겠으나, 배경이 인도이니 용서하기로 하자. 인도영화 <세 얼간이>의 “알 이즈 웰(All is well)”처럼 말이다.

 

호화롭고 이국적인 공간에서 말년을 보낼 수 있다는 홍보 문구에 혹한 일곱 명의 노인들이 각자의 피곤한 삶을 정리하고, 인도의 호텔로 향한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호텔은 비록 이국적일지언정, 호화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쇠락해가는 이 호텔을 홀로 지키고 있는 인도 젊은이 소니는, 호텔의 장밋빛 청사진을 열심히 설명하지만, 얼떨결에 이곳에 투숙하게 된 영국 노인들은 뭔가 불안하다. 그렇다고 달리 갈 곳도 없다. 지금부터 이들의 사연이 하나씩 실타래 풀리듯 펼쳐진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멋진 짝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누군가는 실패한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 연인을 다시 찾아 길을 해멘다.

 

서로 티격태격 아웅다웅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영화는 관객들에게 읊조린다. 인간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변화를 꿈꾸는 존재가 아닐까. 또 여기 나오는 여러 명의 주인공들처럼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랑을 꿈꾸는 존재이기도 하다. 주디 덴치, 빌 나이, 톰 윌킨슨, 매기 스미스 등 영국 중견 배우들의 명연기에 힘입어, 영화는 노년의 인물들이 나온다고 해서 괜히 설교하지 않고도 꽤 묵직한 여운을 객석에 남긴다. 극중 화자 역할을 맡은 주디 덴치는 말한다. "결국엔 다 괜찮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 괜찮아질 때를 기다리고, 죽을 때까지 그 순간이 오지 않더라도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어쩌면 그 희망이야말로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들어주는 진짜 희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고 나서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는, 적어도 좋은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

 

 

2012.7.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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