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살 샘' 소년에게 배우는 죽음

영화 이야기 2012. 4. 19. 17:53 Posted by cinemAgora

 

당신은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을 언제 처음 했었나. 내 경우엔 아버지가 돌아가신 중학교 2학년 때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내게 죽음이란 건 너무 막연한 것이어서, 도무지 내 생명이 끊긴다는 것,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 우습게도 관에 누운 듯한 자세로 오랫동안 숨을 참아본 적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실제 죽음을 목격하게 될 때까지 죽음은 초현실의 개념으로 남았다.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대개의 사람들은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모른 척 하고 삶의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산다. 아마도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삶은, 그 자체로 너무 고통스러울 게 뻔하니까 말이다.

 

<열두살 샘>의 주인공 샘은 시한부 백혈병 환자다. 어쩌면 죽음이란 걸 생각하기엔 아직 너무 이른 나이에,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걸 목록에 적는, 이른바 ‘버킷 리스트’라는 걸 만든다. 열두 살 소년답게 그의 버킷 리스트는 딱 그 나이답다. 과학자 되기, 공포영화 보기, 에스컬레이터 거꾸로 타기, 비행선 타보기, 어른처럼 술 마시고 담배 피기, 여자 친구랑 키스하기, 우주선 타고 별보기, 뭐 그런, 어떤 것은 시답지 않고, 어떤 것은 실현 불가능할 것들.

 

병원에서 만난, 역시나 시한부의 또래 친구인 펠릭스와 함께 샘은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차근차근 실천에 옮긴다. 그리고 이 과정을 영상에 담는다. 그로서는 매우 운좋게도 그의 노력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그는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거의 모두 실현한다. 물론 여자 친구랑 키스하기의 순간이 그로선, 그리고 관객들의 입장에서도 가장 짜릿하다.

 

시한부 환자가 속한 가족이 대부분 그렇듯, 샘의 가족도 어둡고 우울하다. 특히 샘의 아빠는 샘이 곧 죽는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샘은 그런 아빠가 못마땅한 한편, 측은하다. 어떤 계기를 통해 이제 죽음을 얼마 남지 않은 샘과 아빠는 비로소 진심어린 소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버킷 리스트를 채운다.

 

이렇게 줄거리만 전해 듣는다면 <열두살 샘>은 어느 시한부 꼬마의 슬프고 처연한 사연을 펼쳐 놓으며 관객들의 눈물샘을 세게 자극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실 것 같다. 그러나 그 짐작은 틀렸다. <열두살 샘>은, 오히려 상당히 유쾌하고도 가벼운 호흡으로 샘의 버킷 리스트를 따라 간다. 이 과정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한 소년의 성장담이자, 샘을 둘러싼 가족들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어찌 보면 그 사실이 샘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찾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에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방식에 대해, 그가 열두 살이든, 팔순 노인이든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를, 어떤 보편적 미덕을 관객들에게 툭 던져 놓는다.

 

영화를 보며 나는 그 미덕을 샘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하고 싶은 일을 다하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것은, 죽음 이후에 남게 되는 이들을 제대로 위로하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샘의 버킷 리스트의 진정한 마지막 항목이었을 것이다. 죽는 자는 사라지지만, 남는 자는 자신들의 삶을, 그리고 상실의 아픔을 또한 견디며 살아가야 할 것이기에, 어쩌면 그들에게 사멸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만으로도 넉넉한 위안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을, 샘은 그의 행동으로 가르친다. 그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자가 살아 있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자, 예의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12년의 짦은 생을 마감해야 하는 샘 역시 살아 있는 자들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더 나아가 삶의 스승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영화 <열두살 샘>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 꽤나 유쾌한 방식으로 성찰할 기회를 준다. 죽음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삶을 제대로 완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극장문을 나서며 해봤다.

 

2012.4. 빅이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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