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영화 <도가니>가 일으킨 사회적 파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무도 영화 한 편이 이토록 위력적인 영향을 발휘하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하마터면 수면 밑으로 가라 앉을 뻔한 광주 인화학교의 천인공노할 성폭행 사건을 끄집어낸 이 영화는, 경찰의 재수사뿐 아니라 관련 입법 추진까지 이끌어냈다. 영화가 현실의 부조리를 상기한 걸 넘어 현실의 개선을 견인한 사례이니, 이 시대엔 영화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새삼 재확인시킨 셈이다.

사실 <도가니>와 같은, 이른바 사회파 영화의 강세는 2010년 가을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가 흥행에 성공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부당거래>가 비리 경찰과 비리 검사의 힘겨루기라는 설정을 통해 이 시대 공권력의 부도덕을 통렬하게 비꼬았다면, <도가니>는 실존했던, 사법 시스템의 무기력을 도마 위에 올림으로써 공분을 자아냈다.

두 영화의 흥행 이면에는 관객들의 결핍이 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결핍이며, 정의를 지켜야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방법론은 다르지만 <완득이>의 흥행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다. <완득이>의 ‘동주’ 선생님은, <부당거래>와 <도가니>가 들춰낸 결핍을 대리 충족시키는 아이콘이다. 관객들은 완득이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를 넉넉하게 껴안는 동주를 통해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정의로운 리더의 모습을 바라본다. 말뿐인 정의가 아니라 실질적인 정의가 작동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그리고 눈물 짓는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1월 19일 개봉하는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은 어쩌면 최근 이어져온 일련의 한국 사회파 영화의 화룡점정과도 같은 역할을 할 만한 작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부러진 화살>은 <도가니>처럼 실제 사건을 끄집어내는 가운데서도 <도가니>보다 더욱 도전적이고, 따라서 기득권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불온하다. 하지만 그만큼 통렬하다.

사회 문제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몇 년 전 언론 매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이른바 ‘석궁 테러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디테일한 사건의 전모를 다 알지 못하더라도, 언론에 의해 다뤄진 그 사건의 키워드는, ‘사법부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영화 <부러진 화살>은 바로 그 키워드에 대한 거역을 시도한다. 그리고 사건의 주인공이, 그러니까 석궁을 들고 판사를 찾아간 대학교수가 왜 사법부의 권위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으며 재판 과정에서 실제로 어떻게 도전했는지를 차근차근 풀어 헤친다. 영화는 그 과정 속에서 이미 결론을 내고 진행되는 재판, 또는 이미 유죄를 확정짓고 그 전제를 향해 나아가는 재판의 우스꽝스러움을 전시한다. 관객들은 씁쓸하게 웃게 될 것이다. 그 과정 자체가 정말 코미디를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석궁 사건의 용의자, 안성기가 분한 대학교수의 깐깐한 캐릭터가 주는 묘한 매력이 발산된다.(2000년대 이후의 배우 안성기에게 이토록 잘 어울리는 캐릭터가 또 있었을까?)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는, 형사소송법을 들이대며 재판정의 논리가 아닌 법의 논리로 자신을 단죄할 것을 요구한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재판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만, 이미 사법부에 대한 괘씸죄를 짊어진 그에 대해 재판부는 관용을 베풀거나 법의 논리에 충실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적어도 영화상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영화는 시대를 느끼는 관객의 정황적 정서에 가 닿는다. 정황적 정서란 뭘까? 나는 그것을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라고 부르겠다.

90년대 초반 <남부군><하얀전쟁> 등의 문제적 영화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통찰했던 정지영 감독은, 모처럼 메가폰을 쥔 대중 영화 <부러진 화살>을 통해 바로 지금, 이 시대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논평한다. 그 논평은, 1980년대 할리우드 직배에 맞서 극장에 뱀을 풀었던 그답게, 아주 맵고 야멸차며 독하다.

2012.1. 빅이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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