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는 명백히 하나의 브랜드다. 한국영화에서 홍상수라는 이름이 주는 존재감은 매우 독특하고도 강력한 것이어서, ‘홍상수 영화‘라고 불렀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의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나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공통감을, 그의 영화는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영화를 ’동어반복의 미학‘이라고 부른다.

그의 영화에는 거의 어김없이 홍상수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 영화 감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주인공은 한때 잘나갔으나 지금은 별로 잘 나가는 감독이 아니다. 한마디로 시간이 아주 많아 이리 저리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처음 본 여자에게 술김에 대시하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증오에 몸서리 치기도 한다.

형식적인 면에서 홍상수의 영화가 즐겨 쓰는 방식은, 대구의 묘인 것 같다. <생활의 발견>(2002)의 김상경이 춘천과 경주에서 각각 예지원과 추상미를 만나 서로 다른 느낌의 찰나적 로맨스를 경험하는 것처럼,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방식의 대구는 최근 영화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하하>(2010)는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의 술자리 대화의 틀을 빌어 통영에서 있었던 두가지 해프닝을 펼쳐 보인다. 고작 3천 만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옥희의 영화>(2010)는 옥희(정유미)을 중심으로 그녀가 만난 두 남자인 이선균과 문성근이 대구를 이룬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영화는 스타일에 대한 강박조차 버린 듯, 카메라에 들어온 인물들의 대화를 넌지시 응시하는 방식의 롱테이크가 빈번해졌다. 카메라는 말을 하는 인물에게 집중하도록 적절한 프레임으로 줌인되는 게 고작이다. 이런 스타일이 없는 스타일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대화에 집중하면서, 홍상수가 펼쳐 놓는 어쩌면 찌질한 인간 군상을 넌지시 비웃게 만드는데, 늘상 그렇듯 그 비웃음이란 건 사실 감독 자신과 우리들을 향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홍상수 영화에 열광하는 건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바로 그 군더더기 없는 솔직함 때문일 것이다.

내가 홍상수 영화의 특성에 대해 서두부터 주절주절 늘어 놓는 이유는, 그의 열두번째 장편 영화 <북촌방향>에서도 홍상수 영화적인 특성이 그대로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동어반복의 미학과 스타일 없는 스타일, 솔직하게 툭 터놓는 쿨한 찌질함이 서울의 북촌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소박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앞선 영화들과 다소 다른 시도를 보여주는데, 두 공간이나 두 인물이 대구를 이룬다기보다 북촌이라는 공간이 반복 변주되는 방식이다.

헌법 재판소가 있는 재동 사거리와 정독도서관 언덕길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친한 형을 만나러 서울에 온 영화 감독 성준(유준상)의 동선에 따라 북촌의 몇 군데 음식점을 옮겨 다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공간이 ‘소설’이라는 술집이다. <북촌 방향>의 인물들은 이 공간을 세 차례 반복해서 방문하는데, 그 때마다 이집 여주인 경진(김보경)은 늘 손님들보다 늦게 나타나고, 먹을 것을 사러 외출한다.

감독은 소설이라는 같은 공간을 되풀이해서 보여주며 그때마다 반복되는 것과 달라지는 것의 미묘한 대구를 보여준다. 성준은 경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 집에 올 때마다 하나밖에 칠 수 없는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다. 자신의 옛 애인과 술집 여주인 경진이 닮았다는 이유로 성준은 그녀에게 접근하는 가운데, 그와 영화과 교수 보람(송선미), 이제는 배우 생활을 접은 중원(김의성), 영화 평론가 영호(김상중) 등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교차한다.

<북촌방향>에서 특히나 반가운 인물은,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의 김의성이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그리 길지 않지만, 실제로 그 자신을 투영한 듯한 중원이라는 캐릭터는, 성준을 향해 “넌 너무 이기적이야”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어쩌면 감독으로서 홍상수가 갖는 관계에 대한 성찰이 그와 영화적 동지였던 인물들을 통해 은연중에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영화 초반부에 우연치 않게 생면부지의 영화과 학생들에게 술에 취한 성준이 내뱉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따라하지 좀 마, 따라 오지마”라는 그의 취중진담은, 어쩌면 홍상수 월드를 복제하고 싶어 하는 영화 지망생들을 향한 따끔한 지적처럼 들린다.

인물들의 심리를 거칠고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는 홍상수의 영화적 동어반복은 <북촌방향>에서 더욱 초탈한 듯 보인다. 그는 거창한 듯 포장하지만 구태의연함 속에서 치사하게 밀고 당기는 관계의 되풀이되는 줄다리기를 보여준다. 그 속에서 영화 속의 인물과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 스스로를 향한, 어쩔 수 없는 연민을 끄집어낸다. 언제나 그렇듯, 그 연민은 밉지 않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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