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무산일기'일까.

영화 이야기 2011. 5. 5. 14:16 Posted by cinemAgora

<무산일기>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이 질문이 퍼뜩 떠오른다. 주인공 승철(박정범)은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탈북자다. 영화는 줄곧, 그가 남한 사회에서 인고하는 극단의 외로움과 밑바닥 삶을 따라 간다. 그런데 왜 영화의 제목은 무산일기일까?


 

승철에게, 무산은 배고픔의 고통을 상징하는 시공간이었을 것이다. 배고픔을 피해 그곳을 떠나온 승철에게 남한 사회는 어쩌면 또다른 무산이다. 저곳이 배고픔의 시공간이었다면, 이곳은 폭력과 고독이 넘실대는 곳이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그는 무산을 탈출할 수 없다.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한의 무산이 그에게 강요하는 룰을 피부에 새기는 것. 그러기에 너무 착하고, 너무 순박한 그이기에 줄곧 내쳐지는 것도 꾹꾹 삼켜 왔지만, 그는 살아 남기 위해 배워야 한다. 이쪽 무산에서의 법칙을.

그것은, 생존을 위한 배신과 기만, 그리고 편리한 자기 정당화. 그렇게 천천히, 그의 동료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둘러싼 남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끝내 굴종한다.

 

어느 사회든, 그 사회가 건강한지를 가늠하는 척도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의 한국 독립영화들이, 이주 노동자나 탈북자 문제를 중심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은, 그러므로 독립영화적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타당한 접근이다.

 

박정범 감독이 연출과 주연을 겸한 <무산일기>, 앞서의 영화들과 맥락은 같되, 시선은 사뭇 다르다. 이 영화는 승철이라는 탈북자의 지난한 삶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승철은, 남한 사회의 부조리,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그것이 잘못인 것조차 몰랐던 것들을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다. 처음엔 익숙하지만 낯설게 보여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던 그 거울은, 그러나 참혹하게도 서서히 우리와 닮아간다. 그리하여 거울은 우리가 된다.

 


승철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아주 중요한 인물로, 그가 짝사랑하는 대상이자 노래방 집 딸 숙영(강은진)이 있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숙영은, 노래방에서 주류를 판매하고 도우미를 기용하는 불법 영업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부끄러워 한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을 그녀의 신앙이 정당화한다.

 

숙영은, 노래방에서 일하는 승철이 도우미들과 찬송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한다. 승철은 그것이 왜 잘못인지 이해할 수 없다. 스스로 신앙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다고 고백한 숙영이 왜 도우미들과 찬송가를 부르는 데 대해 화를 내는지, 그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승철은, 자신을 기만하고 겁박하는 동료 탈북자들과 잔혹한 남한 사회의 정글 법칙 앞에서 서서히 숙영이 택한 삶의 방식을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그래, 죄를 지으면 어때, 기도하면 다 되는거야, 숙영의 신앙은, 세속적 기만에 굴종한 삶에 대한, 편리한 심리적 알리바이로 작용하고 있음을, 승철은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숙영의 신앙은,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누군가를 껴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만한 대상을 확인하고, 그 제스쳐를 취하고 있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것이 자본주의 남한 사회에서 생존하고, 외로움을 벗어나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그는 알게 되는, 아니 암기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영화는, 그가 우리와 닮아가는 것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무산일기>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처럼 가슴이 먹먹해지는 영화들을 보고 나오면 소주 한 잔이 고프다. 참괴감, 그리고 뼈가 시릴 정도의 잔영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영화들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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