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중견 영화 프로듀서와의 술 자리에서 들은 얘기다. "상업영화는 버스와 같아요. 일단 관객들을 버스에 태우기만 하면, 승객들은 운전 기사가 달리는 길로 함께 달리게 돼 있죠."
그 프로듀서의 '버스론(論)'에 걸맞는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800만 명 이상의 대박급 흥행에 성공한 <웰컴 투 동막골>(2005)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국 전쟁의 와중에 강원도 두메 산골에서 맞닦뜨린 국군 탈영병들과 인민군 패잔병들. 전쟁은 먼나라 일로만 알았던 순박한 마을 사람들. 이 세 그룹의 조우만으로도 영화는 이미 관객들을 버스에 태우는 데 성공한다. 자연스레, 관객들은 궁금해진다. 이들 사이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김주혁이 인민군 장교로, 정려원이 순박한 시골 처녀로 분한 <적과의 동침> 역시,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인민군과 마을 사람들의 조우라는 면에서 살짝 <웰컴 투 동막골>을 닮은 구석이 있다. 어느 정도, 말 그대로 어느 정도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 역시.
그런데, <적과의 동침>의 설정은, 크게 설득력이 없다. 무엇보다 <웰컴 투 동막골>과 달리 흥미로운 긴장감도, 거기서 파열되는 유머도 발생하지 않는다. 인민군이 평화롭던 시골 마을에 주둔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들의 명령에 따라 방공호를 판다. 인민을 위한답시고 툭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극악한 소대장과는 달리 정치 장교 김주혁만이 마을 사람들에게 호의적이다. 영화는 여기에 김주혁과 정려원의 과거사와 얽힌 사연을 소개함으로써, 로맨스 라인을 배치한다.
요약하면 대립 구도는 극악한 소대장과 마을사람들인데, 영화의 초점은 그게 아니다. 사실 거기에 초점을 둘 수 없는 게 이 영화의 한계다. 장르가 코미디로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민군이 주둔한 지역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에피소드들, 이를테면 이웃 마을들 사이의 방공호 유치전이라는 억지 설정으로 웃음을 끄집어 내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그 웃음이 폭발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김주혁과 정려원 사이의 멜로 라인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짜깁기한 듯한 악역 캐릭터의 배치와 드라마의 흐름이 시종 겉돌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이렇게 한참을 겉돌다가 영화는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예상 가능한 위기를 만들어내고, 전쟁의 참상을 강조하려 든다. 이념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설교하려 든다. 지금껏 웃음을 책임지던 캐릭터들이 어색하게 울부짖는다.
물론 전반부에 웃기고, 후반부에 울리는 건 한국 휴먼 코미디 영화의 일종의 공식이었다. 이 영화도 그 공식을 따르려 하고 있지만 이미 드라마의 설득력이 한참 떨어진 뒤의 눈물 코드는 눈물 대신 실소를 자아낸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용서할만한, 회심의 장면이 있다면 모를까. 이러니, 영화 막판의 전투신에선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저 엉성한 전투신을 찍느라 돈을 얼마나 썼을까, 아까워라."
앞서 소개한 프로듀서의 '버스론'에 빗대 이 영화를 설명한다면 이렇다. <적과의 동침>은 승객들을 태우지 못한 채 혼자 달리며 열심히 "다음 정류장" 안내 방송을 틀어대고 있는 버스다. 4월 28일 개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