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일종의 필독서였다. 원작 팬들의 많은 분들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제를 버리고 굳이 '상실'과 '시대'라는 단어를 제목에 차용한 데 대해 불만들 토로했다. 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한국판 제목은 청춘을 '상실'이라는 범주로 묶어 버린다. '시대'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시절이라면 몰라도, 청춘의 보편적 특질을 뭐 대단히 거창한 듯 특정 시공간에 묶어 버리는 그 제목은 도무지 어느 분의 협소한 두뇌에서 튀어나왔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청춘은 무정형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감수성만큼이나 리비도도 하늘을 찌른다. 아픔이 뼈를 녹이고, 쾌락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을 뒤틀 수밖에 없는 나이다. 소설 속 주인공 와타나베도 그런 인물이다. 그는 친했던 친구의 자살로 절망감에 휩싸여 살지만, 동시에 굳건한 욕망을 품고 사는 청년이다. 친구의 여자친구였던 나오코와 머뭇거리는 사랑을 하면서도 이 여자 저 여자와의 하룻밤 사랑도 마다하지 않는다. 당돌하게 다가온 미도리에게도 마음을 빼앗기는 한편, 나오코에 대한 연정도 포기하지 못한다. 그는 방황이라는 명목의, 에너지 충천기를 통과하고 있는 와중이다.
따라서 와나타베의 청춘은 어쩌면 기록 불가다. 그 무정형의 방황의 시절을 당사자가 어떻게 현재형으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60년대 후반에 대학 생활을 보낸 하루키가 굳이 20년이 지난 1989년에 이 소설을 낸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어쩌면 청춘은 시간이 많이 흐르고 되돌아봤을 때 그 모양새가 살풋 보이는 시절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하루키가 담아낸 바로 그 청춘의 정서를,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긴 트란안훙이 놓치지 않았다면 그걸로 성공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대로, 무정형과 참을 수 없는 텅빈 여백, 그리고 용솟음치는 욕망이 얽히고 설켜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는 안개와 미로. 시도 때도 없이 스며드는 슬픔, 그러나 또 달뜸. 그 사이의 종잡을 수 없는, 어떤 언어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그것.
과연 영화도 그렇다. 소설의 매혹이 문장이라면 영화의 매혹은 장면과 편집에서 빛을 뿜는다. 트란안훙의 <상실의 시대>는 원작의 아우라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원작의 정서를 받아 안으면서, 그림과 소리로 정서를 전달하는 영화 감독이 설계한 버전의, 새로운 <상실의 시대>를 선보인다.
그 증거는 몇가지 빛나는 영화적 장면들이다. 이를테면 와타나베가 미도리의 집에서 데이트를 하는 순간, 카메라는 공간을 부유하는 듯한 두 사람을 역시 부유하듯 좇는다. 그 작은 공간에서 이들 사이에서 어떤 정체 불명의 전류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오코가 바람 부는 갈대숲에서 와타나베에게 수음을 해주는 순간, 두 사람이 눈밭에서 뒹구는 순간, 카메라는 멀찌감치 이들을 비추며 아득한 정서를 얹는다. 이제 곧 끝날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그러나 지금은 서로를 안을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운명이 거기 걸쳐 있다.
'라디오 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는 바로 그 장면들에 절묘하게 개입하는 정서의 선율을 얹는다. 장면과 음악의 배합이야말로, 소설에선 도저히 만끽할 수 없는 영화적 쾌감의 정수다. 무엇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그 유명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 원곡으로 흐를 때, 우리는 비로소 문학과 영화가 한 몸처럼 뒤엉켜 온전하고도 충만한 사랑을 나눴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완성형의 사랑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슬픔과 상실은 멀어지고, 삶과 사랑은 계속된다. 영화 <상실의 시대>는 소설로부터 쭉 뻗어진 길 한가운데를 터벅터벅 걸어와 관객의 가슴에 슬며시 내려 앉는다.